국가인권위원회는 집회금지 통보서를 전달하면서 허락 없이 캠코더로 시민을 촬영, 사생활을 침해한 경찰관에 대해 주의조치를 권고했지만 경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20일 밝혔다.

인권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2일 오전 11시쯤 마포경찰서 정보과 소속 경찰관이 A씨(52·여) 집 초인종을 눌렀다. 경찰관은 A씨가 전날 신청했던 집회에 대한 금지 통보서를 전달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통보서를 받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A씨는 계단 밑에서 캠코더로 자신을 찍고 있는 다른 경찰관 한 명을 발견했다.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었던 A씨는 당황해 슬리퍼 한 짝을 집어 던졌다.

A씨에 따르면 촬영하던 경찰관은 급히 캠코더를 들고 달아났다. 다른 경찰관도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한 A씨의 손목을 비틀고 달아났다. A씨는 곧바로 마포경찰서에 사과를 요구했지만 서장은 ‘적법한 공무수행이었다’며 묵살했다. 수치심을 느낀 A씨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조사를 통해 A씨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캠코더 촬영 화면에는 A씨가 경찰관에 의해 촬영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슬리퍼를 던지는 장면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인권위는 해당 경찰관이 신분을 밝히지 않고 현장을 급히 떠난 것도 확인했다.

인권위는 이 같은 사실이 무리한 공무수행이자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 지난 1월 25일 해당 경찰관에게 주의조치하도록 마포경찰서장에게 권고했다. 그러나 마포경찰서 관계자는 “집회금지 통보서를 전달하는 상황에서 진정인이 갑자기 나와 신체의 극히 일부분만 찍혔을 뿐”이라며 “진정인이 주장하는 피해 정도가 공공질서 유지에 비해 중대하지 않아 권고를 이행할 수 없다”고 답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촬영한 것인 만큼 적법하다”면서 “촬영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진상조사는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경찰이 인권위 권고를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경찰이 행정상 불이익도 없는 주의조치 권고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
  • 경찰이 집회·시위 현장이나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등을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 시정권고를 받는 횟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경찰 발생사건 10만건당 인권위 권고건수는 6.6건인 것으로 조사됐다.

    더구나 4대강 살리기, G20 정상회의 등으로 올 하반기에도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데도 경찰은 내부적으로 인권침해 소지를 줄이기 위한 적극적 개선 노력보다 ‘인권위 권고 건수의 전년 수준 유지’라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14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 발생사건 10만건당 인권위 권고 건수는 2007년 3.1건으로 2006년(2.9건) 대비 6.9% 늘었고, 2008년에는 3.8건으로 전년 대비 22.5% 상승했다. 2009년에는 모두 6.6건으로 2008년에 비해 73.7% 늘었다.

    경찰에 대한 인권위 권고는 2005년 42건, 2006년 50건, 2007년 57건으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2008년 한 해 37건으로 줄었지만, 이듬해인 2009년에는 다시 58건으로 훌쩍 뛰었다. 올해 3월까지는 모두 9건의 권고를 받아 수용할지를 검토 중이다.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사례도 늘고 있다. 경찰은 2005∼2008년 매년 1∼3건의 인권위 권고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지난해에는 모두 5건의 수용을 거부했고 그나마 11건(3월 현재)은 아직 별다른 답변 없이 검토만 거듭하고 있다.

    2009년 말 쌍용차 평택공장 노조원 점거농성 과정에서 경찰이 과도하게 봉쇄 조치했다고 인권위가 인정한 사안에 대해서도 경찰은 최근 “별도의 (시정) 조처를 할 이유가 없다”며 불수용 통보했다.

    인권 침해 시비는 해마다 늘고 있지만 경찰은 내부적으로 올해 인권보호 활동 성과목표를 ‘사건 10만건당 인권위 권고 건수의 2009년 수준만 유지한다’고 설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매년 이 수치를 줄여 인권침해 시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온 것과 달리 이번에는 아예 개선보다는 ‘현상 유지’에 무게를 두겠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올해 G20 정상회의뿐 아니라 세종시 수정안, 4대강 살리기 등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현안이 많아 현실성 있는 목표를 설정한 것”이라며 “경찰 내부에선 인권위 권고가 사실관계를 벗어나거나 명백한 증거가 결여된 경우가 많다는 비판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인권보호는 수사기관 존립의 본질적인 이유”라며 “인권침해 소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는 못할망정 현상유지라는 목표를 세운다는 건 터무니없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김재홍 기자 h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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