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망각하는 것들(김영미 위원)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은 혼자서 사는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다는 걸 가르쳐 주는 건 부모가 가르쳐야 할 몫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가시 돋친 말로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 나의 행동으로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아이들의 태도. 공부만 잘하면 그런 건 대수롭지 않다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석이는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지만 학급의 학생들은 석이를 “문제 메이커”로 부른다. 얼마 전 교실서 신체의 질병으로 힘들게 생활하는 학생을 “무뇌아, 쓰레기” 등으로 수업시간에 옆의 학생과 쪽지로 비웃다가 그 학생과 싸움으로 번져 석이의 부모가 담임교사를 만났었다. 석이 부모는 “그 학생에게 직접적으로 욕을 안했으니 문제가 없지 않느냐?, 또 한 대 맞았으니까 죄가 없어진 것 아니냐”며 소리를 높이고 담임교사가 석이만 미워한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석이는 무릎으로 상대편학생 어깨를 차는 바람에 쇄골이 골절되었다. 석이는 다친 학생을 보건실로 부축하지도 않고 바라만 보고 미안이라고 사과만 하고 집으로 갔다. 이일을 석이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았었고 나중에 담임교사로부터 내용을 전해 들었던 부모 또한 다친 학생의 부모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목요일 석이는 교실서 야구공을 던지는 놀이를 하다 다른 학생의 눈을 정면으로 맞추어서 실명의 위기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석이는 공을 던져서 다치게 한 학생의 염려보다는 공을 던지기는 했지만 공을 가져온 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라 급급했다. 다친 학생의 치료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온 담임교사에게 석이 부모는 석이의 주장과 같이 야구공을 가져온 학생의 처벌을 주장했고, 또 그 학생 부모에게 전화로 항의를 하고, 다시 교장실에 전화를 걸어서 석이만 처벌하면 안 된다고 하고 다음날 교장실을 방문해서는 담임교사가 자신의 아이만 미워하고 처벌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올바른 부모 역할에 대한 강의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교육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이다. 학교만 하는 게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육다운 교육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어른이 되지 못한 미완성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고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주적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길러 주어야 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에게 자격증을 주듯  ‘부모 자격증’ 이런 걸주면 어떨까? 가슴 따뜻한 사람.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사람답게 키우는 것도 또한 부모의 몫이다. 서프라이즈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시골훈장’이라는 분이 쓴 ‘자녀를 망치는 열 가지 방법’이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들을 올려놓았다.

『 잘못된 품행을 야단치지 않고 스스로 잘 할 것이라고 내버려 두고 훈계나 훈련이나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무식해서 용감한 독불장군이 되어 사회로부터 격리 될 것입니다.  
  또래들과 다투거나 입장이 다를 때 언제나 아이편이 되면, 장차 이웃과 사회가 모두 그 아이의 적이 될 것입니다.

  훈계하는 스승을 헐뜯는 자녀의 꾀에 넘어가면 장차 부모를 속이고 늙으면 업신여기며 불효를 당할 것입니다. 
  아이가 나쁜 말을 사용할 때, 그냥 웃어넘기면 재치를 키워 장차 더욱 나쁜 말로 이웃에게 상처 줄 것입니다. 』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한번쯤 새겨 들어야할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는 것은 완벽하지 못해도 가슴 따뜻한 사람. 대화로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쫒아 허겁지급 살지 않는 사람 그런 여유로 힘겨운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키울 수는 없을까?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비추! 청년인턴 (손정원)

손정원/ 객원 칼럼니스트

 ‘베이비붐 세대’, ‘386 세대’ 등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닉네임이 있다. 필자처럼 청년실업 100만 시대의 청년들은 ‘88만원 세대’로 불린다. 미취업 또는 저임금 비정규직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표현하는 핵심어인 셈이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대책 가운데 하나가 ‘청년인턴제’이다. 미취업 청년에게 현장 경험과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단다. 

 2009년 3월, 정부 산하 청소년 활동기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10개월 계약직인 줄 알고 일을 시작했는데 공식 명칭은 ‘청년인턴’이었다. 당시 채용 담당자는 “부처에서 일반 계약직 T/O를 주지 않는다”며 “신분만 청년인턴일 뿐 급여는 일반 계약직과 다를 바 없다”는 친절한 설명을 해줬다. 기관 전체 직원 40명 중 절반인 20명이 비정규직이었는데, 청년인턴은 그 중 일부였던 셈이다. 


10개월짜리 비정규직 ‘청년인턴’

 애초 ‘청소년 해외봉사단 코디네이터’라는 업무를 보고 지원했기에, 신분 명칭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열심히 하면 될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할수록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다가왔다. 

 어느새 연말이 왔다. 계약직에게 12월이란 마치 ‘선고일’과도 같다. 그 해 겨울, 비정규직 20명 가운데 정규직을 선고 받은 이는 단 1명도 없었다. 12개월 단위로 계약한 보통의 비정규직들은 계약기간을 12개월 더 연장했고, 이미 24개월 동안 계약직으로 일한 이들은 하는 수 없이 다른 둥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계약기간이 10개월이던 청년인턴은 딱 한 달 만 연장이 가능했다. 한 달의 추가계약 기간이 지난 뒤 담당 직원이 조용히 불렀다. “더 이상 계약 연장이 안 된다.” 이어지는 설명. “11개월 경력으로는 어딜 가도 쓸모가 없으니, 한 달 만 쉬었다 나오면 돼.” 다시 청년인턴 채용공고가 날 것이니 그때 지원하면 재고용이 된다는 얘기였다. 반드시 1달 간의 공백을 거친 뒤 다시 10개월짜리 계약을 새로 맺어야 하는 이유는, 12개월 이상 근무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두 번째 계약만이라도 12개월을 단위로 했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청년인턴으로서는 퇴직금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경력단절 없이 일할 수 있는 1년 단위 계약직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일선 현장에서 청년인턴은 ‘더욱 질 나쁜 비정규직’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다시 구직자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지난 2009년 5월 1일 119주년 노동절을 맞아 울산대공원 동문에서 지역 노동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민생민주 살리기 울산대회'를 연 가운데 대회 관계자들이 피켓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예산은 예산대로 낭비, 청년은 청년대로 불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동안 취업시장의 문은 더욱 좁아져 있었다. 전 직장의 직원 말처럼 11개월짜리 청년인턴 경력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다. ‘T/O가 없어 청년인턴이라는 이름만 빌렸다’는 설명을 누가 들어주겠는가. 당장 생계부터 문제였고, 시간을 갖고 ‘제 자리’를 찾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헤매길 두 달, 결국 다시 청년인턴이 됐다. 이번엔 금융 관련 공기업에서 사회공헌 업무를 봤다. 여기서의 청년인턴은 정말 잉여 인간에 가까웠다. 초기 몇 달은 일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인턴 동기 몇몇이 모이면 하나같이 ‘일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책상에 앉아 다른 일을 하자니 민망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 청년인턴 기간 동안 다른 구직활동을 했다. 기관에서도 면접 등에 대비하라며 3일 간 무급휴가도 줬다. 

 부서 직원과 점심을 먹을 때였다. 그는 청년인턴에게 정을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언제 떠날지 몰라 일을 가르쳐 주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평생직장의 개념으로 일하는 공기업 직원에게 청년인턴은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과 같은 존재였다. 결국 정은 못 주되 업무시간에 취업 공부를 하거나 이력서를 작성하는 등 ‘딴짓’을 해도 눈감아주었다. ‘공부’가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 찾아왔건만, 그리고 여기서 잘 배워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했건만, 현실은 이와 달랐다. 

 다시 연말이 되었다. 이번엔 청년인턴 90명 중 4명이 정규직이 됐다. 나머지는 각자 제 갈 길을 준비했다. 담당한 직원이 조용히 불렀다. “사회공헌 업무에 사회복지사가 있으면 좋겠다. 파견직으로 전환해 일해 보는 것은 어떠냐”는 얘기를 했다. ‘한 달 쉬었다 나오라’는 제안보다는 인간적이긴 했다. 그러나 파견직은 파견업체 소속으로 월급도 더 박했다. 청년인턴으로 일하면서 세금을 포함해 120만원 가량 받았는데, 파견직이 되면 파견업체에서 떼는 몫이 있어 급여가 100만원에도 못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2년 뒤엔 또다시 갈 곳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청년인턴 하지마! 다쳐! 조심해!

 결국 두 번째 청년인턴직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공언한대로 청년인턴이 취업의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이었으며, 되레 다른 구직 활동에 손해가 됐다. 어떤 곳에서도 1년 미만의 경력은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 성공사례가 있다. 정부는 이들을 가리키며 청년인턴이 돼보라고 권유한다. 일단 채용인원을 늘려 취업률을 높이고자하는 심산일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에게 청년인턴은 ‘잠깐 일자리’였으며, 되레 직업 선택의 폭을 좁게 하는 효과만 가져왔다. 

 청년인턴을 염두에 둔 청년에게, 또 청년인턴제를 확대, 재생산하는 정부에 말하고 싶다. ‘청년인턴 하지마! 다쳐! 조심해!


박준성 선생의 슬라이드 사진으로 보는 ‘잊혀진 노동자의 역사’

인권연대 편집부

 박준성 선생(역사학 연구소 소장)은 커다란 등산용 가방을 매고 나타났다. 슬라이드를 볼 환등기가 든 가방이었다. 꽤 무거워보였다. 요즘엔 어딜 가나 빔 프로젝트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을 담은 USB 한 개면 충분할텐데도, 그는 환등기를 고집했다. 환등기로 봐야 질감이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거 였다. 마침 강의가 있었던 날은 ‘밤엔 잠 좀 자자’며 파업 중인 유성기업 노조 파업현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예정된 날이었다. 하루 종일 파업 현장에서 그 무거운 가방을 매고 있었단다. 운전면허도 없기에 무거운 가방을 매고 대중교통수단에만 의지해야 한단다.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이렇게 무거운 짐을 기꺼이 맨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에 우리가 산다.  

 무거운 환등기를 챙겨 다니는 이유에 대해 박준성 선생은 루쉰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유학 시절, 루쉰은 환등기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루쉰은 그의 첫 소설집 <눌함> 서문에, 왜 의학공부를 포기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오랫동안 나는 중국 동포들을 만나지 못했다. 어느날 모처럼 중국인들을 슬라이드에서 보았다. 중국인 한 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사진의 중앙에 있었고, 다른 중국인들을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튼튼하고 건강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통해 너무 명백하게 그들이 정신적으로 둔감하고 멍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설명에 의하면 손을 뒤로 묶인 중국인은 러일전쟁 중에 일본국을 염탐한 혐의로, 곧 본보기로 참수형을 당할 예정이었다. 그를 둘러싼 중국인들은 그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동포 중국인이 처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무감각하게 그 장면을 즐기던 중국인들의 모습은 루쉰에게 충격이었다. 육체적 질병을 고치기보다, 중국인의 정신적 질병을 고치는 게 더 급선무라고 생각한 루쉰은 단박에 의학공부를 중단해버렸다.

 이렇게 슬라이드 사진 한 장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기에, 박준성 선생은 슬라이드 사진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강의 때 그는 모두 200여장의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나 하나는 모두 잊혀져선 안되는 중요한 사건과 인물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사진의 주인공이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이미 잊혀진 존재가 되어 있었다.

 척박한 일제시대였던 1931년 5월,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였던 장주룡이 있었다. 똥물을 뒤집어 쓴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도 거기 있었다.

 전태일이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전태일을 역사로 불러낸 사람들 때문이었다. 변호사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을 썼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지금껏 아들의 몫까지 다하겠다며, 운동의 전선을 지키고 있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오늘의 역사를 주도한다.” 사심(私心)없는 지도자 박정희의 노고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은 그 시대를 떠받쳤던 숱한 노동자들의 삶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는 되풀이 된다. 역사의 주역들을 꾸준히 불러내는 한편, 지금 여기의 일과 사람들을 부지런히 기록하고, 역사에 남기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는 끝없이 이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송두율 교수를 7년 만에 다시 만나다 -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독일 베를린 시내 외곽을 달리던 전철이 한적한 시골역같은 곳에 멈춰 섰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문은 안 열리고 전철이 다시 움직인다. 그때서야 뭐가 문제였는지 깨닫는다. 독일 지하철에선 문에 달린 단추를 눌러야 문이 열린다. 다음 역에서 전철을 반대방향으로 갈아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번엔 제대로 단추를 눌렀다. 단추가 빨간 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며 문이 열렸다. 전철역 바로 옆 주택가로 들어섰다. 초인종을 누른다. 현관문이 열렸다. 3층에 다다르자 7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분들이 따뜻하게 안아주며 어서 들어오라고 잡아끈다.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를 그렇게 7년만에 다시 만났다.

 두 분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9월이었다. 만났다기 보다는 직접 얼굴을 본게 처음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그 해 9월 22일 두분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1967년 유학 이후 35년 만에 어렵게 성사된 귀향이었다.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던 송 교수는 그 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 처음엔 5년 있다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한다. 1972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곧바로 돌아왔다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즈음 두 분은 해외에서 유신독재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귀향의 꿈을 가득 한켠에 묻어둬야 했다.

 그렇게 35년이 흘렀다. 두 분은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두 아들은 독일인으로서 자라며 부모의 고향에 왜 가지 못하는지 묻기도 했다. 35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이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집요하게 송 교수를 심문하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일부 언론은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국정원·검찰·언론은 핑퐁 게임하듯이 그를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몰아가는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작업을 벌였다. 결국 송 교수는 구속됐다.

 법원은 2004년 3월 징역 7년을 선고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다행히 그 해 7월 2심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이 됐고 송 교수 부부는 곧 독일로 돌아갔다. 지난 2일 만났을 때 정 여사는 “당시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 몸으로 겨우 독일로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결국 대법원은 2008년 독일 국적취득 이전의 방북을 뺀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해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고 이는 그해 8월 확정됐다. 1972년 이후 교편을 잡았고 1982년엔 교수자격까지 취득한 학자를 “알고보니 교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몰아가며 기자회견장에선 대놓고 “송 교수님이 아니라 송 선배님께 질문하겠다.”는 뻔뻔한 말을 하던 언론들은 구속 직전까진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양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구속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체했다.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
사진 출처 - 필자

교수 은퇴 이후 더 바빠

 독일로 돌아가고 나서 송 교수는 2009년 가을 정년퇴임했다. 하지만 교수 당시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했다. “한국에선 교수란 자리가 빨리 늙어버리는 것 같아요. 제 지인들을 봐도 그렇죠. 이 곳 독일에선 나이를 먹을수록 학자로서 더 정열적으로 글을 씁니다. 저 역시 힘이 없어 글을 못 쓰는 날이 오기 전에는 계속 글을 쓰려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 종일 책을 쓰는게 요즘 일과라고 했다. 대략 6시간 정도 집필에 몰두한다. 작업은 주로 조용할 때인 저녁 늦게 하는 편이란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게 대여섯 권입니다. 그 가운데 독일어로 쓰는 책이 세 권이죠. 하나는 비엔나에 있는 출판사에서 곧 출간할 예정인데 내가 맡은 부분은 탈고를 거의 했습니다. 191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이 지난 100년 동안 겪어온 정치와 사회 역사를 다뤘습니다. 전문서는 아니고 유럽에서 여전히 한국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핵심 문제를 짚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어로 쓰는 마지막 한국 관련 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더 이상 한국 문제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그래도 내 고향이 한국이니까 쓰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1967년 유학온 뒤 45년 동안 독일에서 겪었던 내 지적편력을 정리하고 고찰하려고 합니다. 현대성(모더니티)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책도 준비중이죠.”

 몇몇 한국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자며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다고 했다. 현재 두 가지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하나는 한국에서 여전히 ‘경계인’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도 많고 궁금증도 많다며 그에 대한 대중서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동의한 뒤 대략 ‘경계인과 세계인’이란 주제로 대학생을 위한 교재 형식으로 구상중이다. “독일에서 반백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한국어로 글을 다듬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면서 “정리는 얼추 해놨는데 출간을 언제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또 하나는 살아온 과정을 되짚어보는 자서전을 쓰기로 한 출판사와 약속을 했다.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 높은 게 비싼집

 두 분은 지금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됐다. 뮌스터대 등에서 교수로 일할 때는 송 교수가 기차로 대학에 가서 며칠 지내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고 한다. 집 근처에 김나지움도 있는 등 교육여건이 좋은데다 집 자체도 마음에 들어서 이사 갈 생각을 안했다고 한다. 한국과는 정 반대로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이 높은 집이 비싼 집으로 통한다는 얘길 들었다며 아는체를 하자 송 교수는 무심한 듯 자세하게 집자랑을 했다.

 “천장 높이는 3.5m”이고 거실 바닥의 목재는 “길이가 8m”이고 “19세기 프로이센 장교들이 살던 집”이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은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양쪽 끝을 다 개방할 수 있다. 손님들을 저녁에 초대할때는 작은 파티장이 될 수 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공기도 맑고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잠을 깬다. 건축양식도 현대 양식으로 넘어오기 직전이라며 ‘희소성’을 강조했다. 자제들을 낳으며 수십 년을 산 집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집 얘기를 듣다가 그가 한국에서 10개월 가까이 겪었던 서울구치소 독방을 떠올렸다. 35년 동안 입식 생활을 해서 한국식 독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변호인단과 주한독일대사관은 책상을 넣어달라고 요구했더. 1990년대 윤금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한국 교도소에 수감됐던 케네스 마클 이병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국의 기준에 준한 감옥에서 인터넷까지 즐기며 감옥생활을 했지만 당국은 송 교수에 대해서는 선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송 교수가 수감돼 있을 당시 두 번 그를 면회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정 여사와 둘째아들을 따라서 갔고, 두 번째는 혼자서 갔다왔다. 면회시간은 짧고 가족끼리 할 말이 많은데 끼어드는게 예의가 아니라서 뒤에서 세분이 독일어로 대화하는걸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정 여사는 “당시 그게 마음에 걸려서 대책위원회에 얘기해서 면회날짜를 하루 잡아달라고 했다.”고 했다. 사실 송 교수와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건 두 번째 면회에서였다. 그러고보니 송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건 그 때 이후 베를린에서 처음이었다. 구속 이후 언론 관심이 멀어질 때 나는 꾸준히 취재를 계속했다. 법정심리가 있는 날은 어김없이 기자회견이 열렸고 나는 거의 모든 자리를 함께했다. 사실 정 여사가 나를 기억하고 단독인터뷰에도 응해줬던 게 다 그 덕분이었다. 정 여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기자 같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두 분은 나를 위해 장을 보고 손수 음식을 준비했다. 오랜 해외취재일정 동안 한국 음식을 못먹었을까봐 고기쌈을 준비했다. 집에서 직접 기른 채소도 꺼냈다. 참 맛난 저녁이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는 김치를 담그고 싶어도 재료가 없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중국인 가게나 인도인 가게에서 비슷한 걸 사다가 김치 대용으로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몇 십년을 지내다보니 이제는 한국요리를 하면 전통적인 맛이 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고 한다. 한편으론 옛 맛을 간직하고 있단 뜻이고 다른 한편으론 평균적인 한국인의 입맛도 많이 바뀐 탓이리라. “가위의 양쪽 끝이 벌어지며 서로 멀어지듯이” 두 분은 가슴속에 간직한 한국과 실제 한국의 거리는 멀어져 있었다. 그 덕에 한국에 와서 상당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초대장을 못 받았다”며 지인의 회갑잔치에 갈 엄두를 못내기도 했다.

 정작 두 분이 기대했던 변화는 너무 더뎠다. 두 분은 민주화된 한국에 용기를 얻어 귀국했지만 고국은 그들이 한국을 떠날 때도 말많고 탈많았던 바로 그 국가보안법으로 송 교수를 잡아넣었다. 정작 송 교수는 수십년 동안 통일이란 화두를 철학적으로 고찰했지만 고국은 그에게 ‘친북인사’란 딱지를 붙였다. 하버마스나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등 전 세계 석학들까지 송 교수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정작 한국에선 송 교수를 아는 사람 중에서도 짐짓 고개를 돌려 모른척했다. 그나마 송 교수 비난에 동참한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해야 할까.  


거실에서 송두율 교수와 함께. 벽에 걸린 액자는 "깨끗함은 결국 화해와 기쁨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사진 출처 - 필자


밤늦게까지 이어진 이야기꽃

 저녁 7시에 초대를 받았는데 저녁을 먹으며, 또 와인을 곁들여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11시나 돼 버렸다. 두 분에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셋이서 당시 얘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다가 가슴 아팠던 얘기에 먹먹해 했다. 고국에 대한 섭섭함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송 교수는 “한국에 대한 책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왠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들었던 많은 얘기 가운데 상당수는 이 글에 담을 수 없다. 예민한 문제들이라서 두 분은 자신들이 한 얘기가 널리 퍼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저 가슴에 묻어둘 밖에.

 오랫동안 두 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처음 송 교수 책을 읽었던 1995년 이후, 그리고 두 분이 망명하듯 한국을 떠날 당시부터 언제나 나는 이 날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7년 만에 다시 만났다. 하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벌써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몇 시에 오겠느냐며 약속시간을 정할 때 낮에 가겠다고 할 걸. 이제 베를린을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다시 그 분들을 뵐 수 있을까.

 그래도 ‘공식’ 인터뷰를 빌어 소개할 수 있는 얘기는 건졌다. 40년 가까이 교편을 잡은 교육자로서 송 교수는 최근의 한국의 교육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독일의 경우 대학 교육은 모두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다. 최근 일부 주에서 등록금을 부과하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한 학기 500유로에 불과하다. 대학생들에게 버스와 지하철을 무료로 해준다거나 하는 등 각종 혜택도 많다. 한국 사립대학들이 한 학기에 800~1000만원 수준의 등록금을 받는다는 건 상대적인 국민소득을 감안할 때 엄청난 부담이다. 이는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값 등록금’ 논쟁에 대해서는 “문제는 단순히 등록금이 많고 적고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면서 “대학 졸업자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등록금을 반의 반으로 줄이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고학력 실업문제, 즉 교육과 고용 정책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장기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는 이름으로 영어수업을 의무화하는 곳이 늘고 있다. 심지어 영어수업 가능자를 교수 임용 조건으로 내거는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미쳤다”며 상당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하기만 하면 미국에서 빌빌대던 사람도 한국에선 교수로 대접받는다. 이래가지고 학문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회가 어떻게 발전한단 말인가.” 그는 ‘학문의 주체성’이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꼬집었다.

 “영어를 잘 구사해야 한국 학문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한다거나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는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어떤 내용을 채우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교수라 해도 문제는 어떤 내용을 강의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수단이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건 말 그대로 ‘주객전도’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전문인력을 적극 육성해야 하는건 맞지만 5000만 국민 모두가 영어 도사가 될 필요가 있겠나. 자국어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는 세계화는 없다.”


송 교수의 비리(?)를 폭로합니다

 얘기를 하다가 정 여사는 내게 송 교수의 엄청난 비리(?)를 폭로했다. 유학 뒤 정 여사는 사서로서 독일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송 교수가 논문 준비와 유신반대운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데다 아이들까지 생기자 도저히 직장을 계속 다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낙 대우가 좋은 자리인 데다가 일을 하고 싶은 욕심에 고민이 정말 많았단다.

“어렵게 사표를 쓰셨겠네요.”
“아녜요. 나는 사표를 도저히 못 쓰겠더라고요. 결국 나는 아쉬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저 양반이 대신 사표를 썼어요.”

 정 여사는 이어 “그렇게 뒷바라지해서 교수 시켰는데. 한국 가서는 또 옥바라지에 1년 가까운 세월 보내며 내가 폭삭 다 늙어 버렸죠.” 내가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엄청난 반응이 나오겠는데요. 이제 집안일은 왠만한건 다 떠넘겨도 되겠네요.”하며 맞장구를 치자 정 여사는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송 교수를 흘겨보며 이렇게 말했다. “후식은 당신이 좀 가져오시죠.” 송 교수, 멋쩍게 웃더니 말없이 부엌으로 가서는 예쁜 유리컵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왔다. 우리는 후식을 먹으며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 한가운데 운치 있게 자리잡은 원목책상을 보고 송 교수에게 “멋진 서재네요. 저기서 글을 쓰시면 글이 더 잘 써지겠습니다.”라고 하자 송 교수가 “아니 이건 저 사람꺼고, 나는 저 옆방에.”했던 게 떠올랐다. 송 교수가 구치소에 있을 당시 바짝 바짝 말라가던 때를 생각하면 송 교수는 앞으로도 안방마님을 잘 봉양해야 할 듯하다.

 추 신: 정 여사는 얼마 전 발코니에 오이를 심었다. 원래는 꽃만 길렀는데 최근 새로 생긴 취미생활이다. 까맣게 윤기 있는 독일 흙은 토질이 워낙 좋아 따로 거름을 안해도 잘 자란다. 올 여름에는 두 분이 하루 종일 먹고도 남을만큼 오이가 열릴 것이다. 하늘 높이 줄기를 뻗으며 풍성하게 열릴 오이처럼 두 분에게 행복과 기쁨이 넘쳐나길 빈다. 그리고 언젠가, 두 분을 서울에 있는 우리 집에 초대해 점심을 대접할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변종 삼포세대의 변 - 김현진/ 에세이스트

김현진/ 에세이스트

 <제 5도살장>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불과 백여 년 동안 인류가 교통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석유고 석탄이고 다 꺼내 썼고 심지어 일본 쓰나미에 원자로까지 걱정할 일 천지다. 소위 결혼 적령기를 좀 넘어섰는데 하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장례식에 오신 손님들이 하나같이 이럴 때 사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이럴 때 결혼을 했었어야지, 그 자리에서 누굴 덮칠 수도 없고 어차피 없는 거, 당장 어디서 사올 수도 없는 바람에 잔소리만 잔뜩 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것만 해도 충분히 속상한데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신랑이 없다고 슬퍼할 정신까지는 없었으므로 아유 그럼요 사위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고 넘겼지만 별로 마음이 급하지 않은 걸 보니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충분히 살겠나보다. 물론 어른들이야 걱정이 늘어진다. 서른이 넘었는데 시집도 안 가고, 외로워서 어떡하냐, 애도 낳아야지, 그런 말씀들 들을 때마다 그냥 귀나 후비게 되는 게 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도 요즘 유행하는 <삼포세대>인 모양이다. 삼포세대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나는 귀나 후비적거리고 있으니 이를테면 살짝 변종 삼포세대인 셈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게 삼포세대라는데 연애는 포기가 안 되는 건지 내가 별 인기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이 좀 낮은 덕에 아무거나 걸리면 그냥 닥치는 연애하는 덕을 보는 건지 아예 간택이 안 되는 날까지는 안 할 생각은 별로 없고, 연애 대신 취업을 포기했다. 이것도 투철하게 포기한 건 아니고 회사 생활도 나름 해보고 이력서 냈다 떨어져도 보고 그러면서 증명사진을 보니 관상부터 아, 회사에 충성할 얼굴이 아니구나 싶어 일찌감치 현실에 적응하고 말았다. 결혼 까짓 거, 남자친구가 있어도 외롭고 제일 친한 친구가 있어도 외로운데 결혼한다고 뭐 그리 안 외로울까, 싶기도 하고 결혼하면 결혼한 대로의 좋은 점이 있고 안 하면 또 안 한 대로의 좋은 점이 있겠지, 하고 나쁘게 말하면 심드렁하게 좋게 말하면 태평해지는 것이 나이 먹는 것의 장점인 모양이다. 출산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이미 인류는 온 지구에 차고 넘치는데, 지구의 인구 대폭발을 걱정하면서 조국의 저출산을 동시에 근심할 수 있는 이들의 심리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이미 60억이 있는데 나까지 보탤 필요가 뭐가 있나 싶다. 앞에서 커트 보네거트가 말했던 대로, 지금까지 있었던 인류가 이미 지구를 충분히 망쳤다. 그런데 뭐 그리 아득바득 낳을 일이 있겠는가 싶은 것도 있고 생명은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큰마음을 먹으면 내 새끼 낳겠다는 생각이 별로 안 생긴다. 게다가 인류가 꼭 존속되어야 할 건 뭐람, 인간이 없다면 지구는 평화로울 텐데.


지난해 4월 한 청년단체 회원이 20대의 팍팍한 삶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주간경향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 맘대로 내 재미만 보면서 살겠다는 건 아니다. “나에게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그것은 회원과 회원이 아닌 사람이다!!!!!!” 라는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님의 사자후에 깊은 감명이랄까 위협이랄까 뭐 그런 것을 받아 인권연대에 당장 가입한다거나 사회적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역시 연대투쟁의 최고는 입금이지, 뭐 이런저런 다짐을 할 때의 마음은 항상 같다. 어차피 모두가 모두의 가족이다. 라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물론 그들이 나를 가족으로 쳐주지 않을 때는 약간 서글프지만 어쨌거나, 굳이 억지로 내 아이 낳을 필요도 없고 굳이 법적으로 누군가와 가족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어슬렁어슬렁 살다가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 싶다. 물론 이것은 이종 삼포세대의 변이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애들이 골비고 나약하고 의지가 부족해서 굳이 삼포세대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88만원 세대니 44만원 세대니 삼포세대니 하고 너무 가엾이 여길 것도 없다. 모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의 고통을 지닌 법이니까, 모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 포기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냥, 너무 착취하거나 너무 잔소리만 하지들 말아 주십사고 하는 소리다.  


대학의 종말 ① - 대학으로 돈 버는 세상 끝내야(이찬수 위원)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한 세대 전만 해도 교육은 근대 문화로의 변화를 선도하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다. 개인과 집안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했고, 산업 현장과 연결되면서 한국 경제발전의 기초를 담당하기도 했다. 교육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자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를 경험하며 헤쳐 온 기성세대는, 교육으로 성공한 이든 교육의 기회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이든, 한결같이 교육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 정점에 대학이라는 것이 있다. 온 사회가 ‘올인’하다시피 하는 대학이란 무엇이며, 오늘의 우리의 대학은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 것일까.

 2. 대학은 본래 교수 또는 학습자들의 모임 또는 조직이었으나, 일제 때 ‘사립학교령’을 설치해 일정 수준의 재산이 있어야 학교 설립이 가능하도록 한 뒤에는 설립자가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하는 흐름이 생겼다. ‘불온한’ 이들의 대학 설립을 제한하려는 전략적 의도에서였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사립대학은 그 뒤 시설로서의 물적 요소와 단체로서의 인적 요소를 함께 가지게 되었다.

 3. 국공립 대학(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법인이 설립자가 되어 시설을 설치, 운영한다)과는 달리, 사립대학은 재산을 근거로 구성된 재단법인이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주체로 부각된다. 법인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학교의 운영 주체이자 소유자로 자리매김해가면서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해 교육 사업을 벌이는 흐름이 커져간 것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법인 이사 내지는 경영자가 교수나 학생에 대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학생, 시민, 야당인사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4. 하지만 대학은 그 의미와 속성상 ‘시설’만이 아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조직’이기도 하다. 대학은 교사와 학습자의 만남을 위한 조직적 중개자로서의 측면도 크다. ‘조직’이란 개별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을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능률과 합리화를 도모하는 활동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분명히 하나의 ‘조직’이다. 당연히 조직 구성원 전체가 대학의 주체이기도 하다. 시설 투자를 한 설립자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학문의 보급자인 전체 교수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시설 운영의 근간인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다 정당하다.

 5. 때론 이 세 주체들이 충돌하곤 한다. 그러나 충돌이 있다는 것은 도리어 학교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영자, 교수, 학생이 어떻든 주체의식,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학 교수들은 자신을 단순 피고용자로 여겨 자신을 선발한 경영자의 경영 방식이나 평가 기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때로는 비리도 눈감아주며 스스로 그에 종속되고 마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냉소적인 회피가 주류를 이룬다. 학생도 별 주체의식 없이 졸업장이라는 자격증만 따면 그만이라는 식의 소극적 처신에 머문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특별히 사립대학의 온갖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립대학의 문제는 대학 구성원이 자기 주장을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도피해 개인의 안일만을 보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대학의 주체들이 교육의 공공성에 눈감으면서 소유 의식이 강한 설립자나 경영자의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 문제도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찬수 위원은 현재 한국종교교육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 여성주의(를 지향하는)자의 고백과 궁금증(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몇 년 전부터 동문회니 동기회니 하는 모임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가고 있다. 아마도 나이 40줄에 들어서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얌전하고 적극적이지 않던 친구들이 동창회를 주도하기도 하고, 괄괄한 성격에 많은 일들을 주도해서 모임도 주도할 것이라 여겼던 친구들은 오히려 모임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명확한 주제가 없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남성들이 많은 집단이 주는 위계적인 문화에 그런 모임들이 벅차기도 하다. 이것도 병이지 싶어 가급적 모임이 있으면 참여를 하는 편이다. 모임참여의 우선 목적은 ‘운동권’이란 테두리 안에 갇혀 지내는 나를 성찰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동물이기에 조금 어색해도 자꾸 어울려야 한다는 자기최면을 걸기도 한다.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만남, 소위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이란 것이 끼리 끼리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주만나야 교류와 소통이 형성되고 그럴 때 다른 생각들이 만나고, 사람들이 상호변화를 통해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을 굳이 육체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성장시키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리라.  

 나는 육체적인 생명 외에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주의자로서의 생명’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여성주의인가? 라는 질문은 나를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무엇이 여성주의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제법 답을 내어놓을 수 있다. 물질만능, 위계, 폭력, 차별, 억압, 전쟁, 경쟁, 이기주의, 자연파괴 등. 여성운동이란 남녀관계의 위계적인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모든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몰아가는 식으로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을 해석하는 것은 반대한다. 여성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여성운동은 가깝게는 남성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질서와 문화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에 있다. 그동안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고 유지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재구성과 재조직을 목표로 하는 어쩌면 지난한 대안을 만드는 작업과정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정치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생활패턴을 전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쩌면 여성주의, 여성운동은 기존질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도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여성주의는 아주 편협한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여성운동을 하는, 그리고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에 대해 모난 척, 잘난 척, 남성 적대적이라는 혹평이 붙고 그리하여 때로는 공공의 적이 되기도 한다. 항상 날을 세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성주의를 지향하면서 살고자 할 때는 스스로에 의해서보다는 남에 의해 날이 세워지는 경우들이 생긴다.

 나는 전교생이 280여명이던 좀 작은 시골초등학교를 다녔다. 전교생이 얼마 되지 않아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이름과 얼굴을 다 욀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초등학교도 매년 총동문회를 개최하고 체육대회를 진행한다. 올해도 이번 달에 총동문회가 열렸고 매년 참석권유를 받기만 하고 참석치 못했던지라 연휴에 고향 어머니도 뵐 겸 동문체육대회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체육대회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인삼각경기도 하고 단체 줄넘기도 하면서 즐거운 한나절을 보내며 흥겹게 그 시간을 즐겼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흡연문제로 남자동창이 시비를 걸고 물건을 던지고, 언쟁이 오가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날 뻔하다 수습되기까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로인해 즐겁던 모임은 순식간에 찬물 끼얹은 듯 냉랭해지고 나는 분노와 억울함에 치를 떨면서 그 뒤 며칠을 엉망인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80년대 겪었던 흡연문제를 이 나이에 다시 겪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과 그 동창 놈과 주변에서 사태가 위기로 진전될 때까지 구경만 하던 친구들에 대한 분노가 좀체 가시지 않아 마침 고향집에 온 동생들과 언니들에게 고자질을 해대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쫓아가 똑같이 복수를 하고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내 편이 되어 함께 그 원수 놈을 욕해주길 바랐던 내 기대와 달리 언니는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가 경남의 시골마을 버스를 탔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타시면서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탈 수도 있으니 떨어져 안자고 하셨단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 옆 자리에는 불행히도 지팡이를 짚으신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께서 앉게 되셨다. 그러자 할아버지 왈 “늙은 호박꽃도 꽃인가?”라고 비꼬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흘기는 사이 할머니께서 응수하시기를 “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하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같이 할아버지에 대한 고소함과 할머니의 재치에 감탄하여 웃었다고 한다.  

 앞에서 여성주의란 기존질서와 가치에 대한 전복이자 대안을 형성해내는 과정이라고 장황히 언급하였다. 언니의 일화를 듣는 순간은 ‘할머니 참 재치 있으시다.’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그 친구가 전화와 문자로 사과를 하였으나 받아들일 맘이 나질 않았다. 오로지 복수 외에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대응 방식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버스안의 할머니는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농담으로 할아버지를 무안함으로 한방에 제압하고 승객들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를 고민하면서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폭력을 이기는 것이 비폭력저항이고 전쟁을 이기는 것은 평화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보복중심의 갈등해결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폭력성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무슨무슨 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이 그러한 주의를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설득력이 생긴다. 더불어 안과 밖이 일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입 따로, 몸 따로 갈 때 그의 말은 설득력을 잃고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나는 얼마나 여성주의자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삶의 과정에서 겪어왔던 날선 갈등과 상처의 자국에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끔 비열하게도 약한 고리를 찾게 되면 폭발한다. 이런 한계와 모순덩어리가 나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나의 한계라는 점을 안다. 알게 되면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아니 매순간 시작해왔는지 모른다. 사람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지만 변화가 그리 쉬운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한계를 고백하는 순간에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남자들은 자기가 모든 여자들의 남편이나, 오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것도 꽤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진정한 남편이자 오빠, 아버지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 한다고 하면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2011년 여름 인권교육 직무연수가 시작됩니다. 신청하세요!
[서울시교육청 직무연수(서울교육 2011-459) 지정]

교육희망, 인권이 해답이다!

 인권연대 교육센터는 여름방학을 맞아 현직 교사들을 위한 인권교육 직무연수 프로그램을 마련하였습니다. 올해로 17기를 맞는 이번 연수에서는 인권교육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번 인권 연수를 통해 선생님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연수안내
○ 일시: 2011년 7월 25일(월)~27일(수), 3일간
○ 장소: 남영동 인권기념관 7층 교육장(옛 남영동 대공분실)
☞ 약도 클릭
          (지하철 1호선 남영역 1번출구, 4호선 숙대입구역 7번 출구)
○ 주최: 인권연대 교육센터             
○ 진행: 15시간(1학점, 성적산출 안함)

 

* 신청안내
○ 대상: 전국 초·중·고 교사 누구나
○ 모집인원: 선착순 40명(입금을 하셔야 최종신청이 완료됩니다)
○ 수강료: 40,000원(교재비 포함, 식사는 개별 진행)
             (인권연대 CMS 회원은 20% 할인으로 32,000원)
○ 입금: 우리은행, 1005-801-523022(예금주:인권연대)
○ 신청방법:
직무연수참가 신청서(다운) 팩스로 접수
○ 접수: (전화) 02-749-9004/ (팩스) 02-3672-0438/
hrights@chol.com

 [2011년 여름 인권교육 직무연수]

인권과 법률

7월 25일(월)

7월 26일(화)

7월 27일(수)

시간

내   용

시간

내   용

시간

내   용

09:30
-
10:00

개강식

10:00
-
11:50

인권문헌을 통해서 본 인권-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0:00
-
11:50

표현의 자유와 법률
-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

10:00
-
11:50

정의와 법률
- 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2:00

점심식사

12:00

점심식사

12:00

점심식사

13:30
-
16
:20

학교에서의 인권교육
- 이필우
(마산 내서여고 교사)

13:30
-
15:20

인권을 위한 법률
-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3:30
-
15:20

생활속의 인권 그리고 법률
-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15:30
-
17:20

학교와 법률
- 김희수
(변호사)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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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

종강 및 평가 설문모둠활동

16:30

종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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