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내일도 없는 청춘의 오늘 (김종천)

김종천/ 객원 칼럼니스트

“오늘은 다만 내일을 기다리는 날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며 내일은 또 내일의 오늘일 뿐이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쓰신 옥중 서간집「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한 구절이다. 암울한 현재를 살아가며 자유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한 글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입시 스트레스에 찌들어있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이 구절을 되뇌며 해방의 수능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넉 달을 궁극의 자유 속에서 보냈다. ‘내일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왔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통기타 치며 노래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을 논하는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기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에는 더 이상 그런 풍경이 남아있지 않았다. 캠퍼스를 누비며 청춘의 낭만을 불태워야할 대학생들은 반 평도 안 되는 도서관 책상에 앉아 대기업 직무적성검사, 공무원 시험 기출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기다릴 내일이라도 있지만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겐 기다릴 내일이 없다. 나날이 오르는 등록금과 갈수록 심해지는 청년실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도서관에 앉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람들은 형편이 나은 편에 속한다.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학기당 4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꼬박꼬박 마련할 수 있는 가정은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4500원 하는 시급으로 한 학기에 약 450만 원 가량 하는 등록금을 내려면 1000시간을 일해야 한다. 학기 중에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 돈을 대려면 하루에 10시간을 일해도 부족하다. 게다가 방값과 생활비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학생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 때문에 대학생들은 독서와 여행을 하며 보내야할 방학을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내고 있다.

 학자금 대출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생들은 복리로 이자가 붙는 이 돈에 미래를 저당 잡힌다. 교육과학기술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현재 학자금 대출액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학생이 2만5366명이다. 불과 3년 사이에 7배(2007년 말 3785명)가까이 늘어났다. 이들은 20대 중반에 이미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을 안고 사회로 나서게 된다.

 궁여지책으로 한 선배는 휴학을 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돈을 벌고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복학을 했다가 학비와 생활비로 번 돈을 다 쓰고 나면 다시 휴학을 하고 일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또 다른 선배는 과외만 4개를 하고 있는데, '대학에 배우려고 들어온 건지 가르치려고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고 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떤 선배는 “한 번에 목돈 벌어서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니겠다.”며 원양어선 승선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비싼 등록금과 심각한 청년실업은 대학생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지난 10년 동안 자취방에 연탄불을 피우거나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생이 2300명에 이른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꽃다운 청춘의 생명이 스러져가는데도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분들은 우리나라의 대학 등록금이 아주 싼 편이라고 말한다.


지난 6월 10일,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반값 등록금 촛불집회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무기력해졌다. 등록금이 지나치게 비싸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더 많이 일해서 등록금을 채우려고만 하거나 장학금을 받아서 해결하려고 한다.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으면 등록금 문제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스펙 열심히 쌓아서 취업 잘 하면 청년실업 문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반값 등록금’에 대한 대학생들의 열망은 촛불과 함께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내일을 희망의 날로 만들기 위해 대학생들이 직접 거리로 나섰다. 3월에 등록금 동결을 내걸고 학교를 상대로 잠깐 싸우던 ‘개나리 투쟁’에서 벗어났다. 지난 5월29일 서울 광화문에서 ‘반값 등록금 실현’과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후 연일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연행과 집회 불허로 맞섰다. 첫날 대학생 73명을 연행한 데 이어, 다음날 집회에서도 학생들의 행진을 가로막았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처럼 커질 것을 우려했는지, 청계광장에서의 집회는 무조건 불허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이 촛불을 끄려고 탄압할수록 촛불은 더 커졌다. 200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는 고등학생과 대학 졸업생, 학부모 등 일반 시민들까지 가세하며 점점 참가 인원이 늘어나더니 지난 6월 10일에는 주최 측 추산 5만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내가 다니고 있는 아주대학교 내에도 몇몇 학생이 매일 저녁 촛불을 들고 있고, 셋이서 들던 촛불을 지금은 열한 명이 함께 들게 되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였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선배도 함께 촛불을 들었다. “나는 이제 등록금 다 냈지만, 그 비싼 등록금을 몇 년은 더 내야할 너희와, 미래의 내 아이를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청춘들에게 ‘내일’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꿈과 희망의 말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청춘들은 내일을 두려워한다. 내일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살아가야할 청춘들이 이처럼 내일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2011년의 대학생들은 그 어느 시대의 대학생보다도 가혹한 청춘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어두운 현실을 환히 밝히려는 청춘들의 촛불은 전경으로도, 살수차로도 막을 수 없다. 60년대 군사 정권의 탄압도 신영복 선생처럼 내일의 자유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열망을 꺾진 못했다. 나는 오늘도 내일의 희망을 위해 촛불을 들러 나간다.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의 한 구절처럼 작은 힘 하나하나가 모여 언젠가 현실의 벽을 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인권연대 회원모임 29탄] "한겨레 이재성 기자와 함께하는 영화 여행

6월 <영화모임>의 작품은 안해룡 감독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9)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고군분투중인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과 그 투쟁을 다룬 영화입니다.

 송신도 할머니(90)는 재일동포 위안부 할머니 중 유일하게 일본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분입니다. 여느 정치가 못지않은 웅변가적 기질과 화통한 성격의 송 할머니는 희망을 감염시키는 묘한 매력을 가진 멋진 분입니다.

  • 일시 : 2011년 6월 17일(금) 저녁 7시 30분
  • 장소 : 영상미디어센터(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 바로 왼쪽 건물 일민미술관 5층)
  • 문의 : 인권연대 사무국(02-749-9004)

  영화 정보

INFORMATION
영어제목 : My Soul Is Undefeated

감독 : 안해룡

주연 : 송신도

배급사 : (주)인디스토리, 시네마 달

제작국가 : 한국

제작년도 : 2009년
상영시간 : 95분
장르 :
 다큐멘터리


SYNOPSYS

"재판에 졌지만 내 마음은 지지 않아."라고 외치는 할머니와 지원모임 사람들이 함께 쌓아 올린 뜨거운 감동의 10년!

"사람의 마음은 한치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아."하시던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

 그러한 모습 그대로 그녀를 받아들였던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람들. 그런 그들이 만났다.

 조심스럽게 서로를 경계하던 그들이 같이 웃고, 울고, 이를 갈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시작한다.

 10년간의 재판을 함께하는 동안, 할머니와 지원모임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찾아간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이지상 위원)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큰 지진이 있었네요. 2011년 3월 11일. 토호쿠(東北)지역. 진도 9.0. 후쿠시마 원전 파괴 방사능 유출. 희생자와 이재민은 얼마나 되는지 모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 우리에겐 무척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각 기관마다 마치 이 땅에서 일어난 재해처럼 들고 일어나 나눔을 강조했고 전파를 쏜다는 방송이면 죄다 ARS 걸어놓고 누가 많이 모으나 경연을 했지요. 이웃나라의 아픔에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살갑고 정다운 일이 없으니 무척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일본의 피해상황만 보도가 될 뿐 그 안에 살고 있는 재일 동포에 대한 뉴스는 한줄 찾기가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되었지요. 도쿄조선 중고급 학교는 강당이 무너졌고 센다이의 토호쿠 초 중급학교는 건물자체가 기울었다는데, 그래서 졸업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데 후쿠시마는 제2의 체르노빌이 되어 방사능 천지가 되었다는데. 그곳에도 조선학교가 버젓이 있는데 이미 4년 전 극우인사인 이시하라의 도쿄도에 빼앗길 뻔 했던 에다가와(枝川)조선학교를 되찾는 모금운동에 참여했던 내가 걱정이 없었다면 말이 안되지요. 이웃나라의 재해복구 성금이 600억원이나 모였지만 그 이웃으로 인해 차별받고 고통 받았던 또 다른 나에게는 단 한푼도 지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요 “거기에 조선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우리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1923년 9월1일 관동 대 지진입니다. 약 15분 동안의 지진 만으로 도쿄의 3/4이 폐허가 되었고 약 14만2천명이 사망할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때 터져 나온 민심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약 6000-9000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던 일은 잘 기억 하실 겁니다. 그날이후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어머니의 말 모국어를 잊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들던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날 이후 말문을 닫았습니다. 젖 먹던 시절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도, 고향땅 밟으며 재잘거렸던 수많은 조선말에 대한 기억도 다 지워야 했습니다. 고향집 주변에 사시사철 피었던 꽃의 이름과 이웃들의 정겨운 말투도 다 잊어야 했습니다.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한 그들에게 맘 놓고 조국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란 잠들기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가족의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20여 년을 더 살아 해방을 맞았고 그해 12월에만 일본 전역에 약 560여개소의 국어 강습소가 세워졌습니다.”

-졸저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중 -

 정체성 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나의 생활이 진창이 될 때면 술 한 병 들고가 잔 올리며 꺼이꺼이 울고 싶은 어머니의 무덤 같은 것. 일본인이 되어 넋 놓고 살아도 생에 단 한번이라도 꿈속에서나 만나는 고향의 바람에 살 부비고 싶은 것. 뼈와 살은 바꿀 수 있으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 이라는 피 때문에 그들은 학교를 세웠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모국어를 가보로 여기며 지난 60여년을 한결같이 교육 시켰습니다. 지난 3월 10미터가 넘는 대형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고 이어 방사능 경보로 온 마을이 텅텅 빈 그때도 후쿠시마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15명은 학교를 지켰습니다. 학교마저 비우면 언제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당장은 죽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보다 우선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학교는 폐쇄되고 인근 니이가타로 이전해야 합니다. 센다이의 토호쿠 조선학교는 무너진 강당 대신에 좁은 식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했습니다. 갓 입학한 어린 초급학교생 들은 갈라진 벽을 임시로 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진이 나고 나서 나보다 더한 조바심을 가졌던 김명준 (영화 “우리학교” 감독)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이대로 있지 맙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여럿이 모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지진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땅연필”


사진 출처 - 몽당연필

뜨거운 청년 배우 권해효와 꽃보다 아름다운가수 안치환. 그리고 늘 부족한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진달래 냄새 가득한 김명준이 집행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몽당연필”의 목표액은 기둥뿌리 두개. 조선학교가 다시 세워지는 그날 건물의 수많은 기둥 중에 두 개쯤은 아이들의 고향 남쪽이 전해주는 두 손의 온기로 세웠으면 하는 것이지요. 지진으로 갈라진 토호쿠 조선학교의 벽에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적은 글귀가 마음을 흔듭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그 글귀에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지난날 그때 만약 이곳 한국에 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면 우리의 아버지가 무서운 총칼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했다면 우리도 이역의 땅에서 핍박받는 조선의 아들, 지척의 갈라진 조국을 어머니로 여기며 오직 “통일” 두 글자만을 그리워하는 조선의 딸.

 사랑하는 아이들아
 고통은 극복 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나 그렇단다
 고통은 견뎌 내는 것. 그것도 웃으며 견뎌 내는 것
 그러니 이제 함께 견디자. 그리고 함께 지키자. 지진과 해일로 방사능 피해로 무너진 너희의 어깨를 아직은  튼튼한 우리의 어깨에 걸고

“대지는 흔들어도 함께 가자, 손잡고 가자 웃으며 당당하게 가자”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위태로운 교직 - 전국완/ 양강중학교 교사

전국완/ 양강중학교 교사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작년에만 4명의 교사가 명퇴하였다. 올해도 이미 40대 교사 한 명이 명퇴에 들어갔고, 두 명의 교사가 8월 말 명퇴를 신청한 상태다. 이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필자도 명퇴 시기를 고민하고 있다. 학교 밖에서는 교직만큼 편하고 든든한 직업이 어디 있냐며 시기어린 부러움의 시선으로 교사들을 바라본다. ‘잘릴 염려 없지, 일찍 퇴근하지, 방학 있지, 퇴직하면 연금 나오지……’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있을까마는, 최근 몇 년 사이 ‘그 좋은 일터’를 중도에 관두는 교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아서이다. 누가 들으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장에선 교사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교직도 엄연히 생계의 수단이지만, 그래도 우리 교사들을 버티게 했던 것 중에 많은 부분은 학생들과의 생활에서 얻는 기쁨과 보람이었다. 한창 몸과 마음에 변화를 겪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얻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함과 감동이 이제는 거의 없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지만 한 때 나누었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으로서의 교감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학원공부가 끝나고 매일 밤 11시가 넘어 귀가해 모자란 잠을 자고, 얼굴에 피곤을 덕지덕지 바른 채 학교수업을 듣는 아이들과의 수업시간, 수업시작 후 20여 분을 넘기지 못하고 여기 저기 조는 아이들을 깨우는 일도 이제는 지친다. 하루 열 시간이 넘는 공부에 치인 아이들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봉변당하는 것도 보통이다. 섣부른 선행학습으로 이미 신선함을 잃은 학교수업을 듣는 일이 아이들에겐 또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생활비의 1/2에 육박하는 사교육비를 대느라 부모들이 밤낮없이 허둥대는 사이, 아이들은 각종 인터넷 게임에 중독이 되어 가고, 우범지대화 되어버린 공원 등지에서 술과 담배와 놀고, 친구들을 때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무서운 아이들로 변신을 한다. 집단따돌림부터 폭력, 금품갈취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학생사안으로 학생생활지도에 학부모면담까지 정신없이 가버리는 교사의 하루가 너무 고단하다.

 이런 현실엔 아랑곳없이 학업성적부진학생 수를 가지고 학교평가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학교간 차등 지급되는 성과급, 이웃나라에서 수 천명이 죽어나가고,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방사능 피해로 전 세계가 떨고 있는 지금, 그래서 국내 과학자들이 당장 올여름 몰려 올 태풍과 함께 닥칠 방사능 오염을 지적하며 정부대책을 촉구하는 뉴스가 나오던 날 ‘원자력...’ 문구가 새겨진 볼펜 한 자루씩 주면서 ‘원자력이 얼마나 안전하고 뛰어난 에너지인지 학생들에게 홍보하라’고 강조하는 교직원회의….

 정신없이 팽팽 돌아가는 학교일상 속에서 아이들에게 치이고, 교육정책에서 소외된 채 영혼 없는 허깨비가 되어 가고 있는 교사들….


교육정책에 경쟁이라는 시장주의를 도입하면서 가장 힘들어지는 건 학생들이다.
교육의 시장화는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 출처 - 부산일보

 요즘 경기도에 이어, 서울에서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서명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인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이 말엔 왠지 학생인권을 위협하는 집단이 다름 아닌 교사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 연전에 현 교육감께서 당선되기 전 교사들과의 대화중에 ‘교사인권’ 관련 질문에 대해 ‘수업공간에서 교사는 절대적인 권력자이며, 당연히 절대적 약자인 학생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답변을 하신 적이 있다. 완전히 잘못된 말은 아니나, 교사와 학생을 대결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학생의 상대는 교사가 아니다. 수업이든 생활지도든 간에 학교의 교실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의 인권은 하나의 덩어리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종이호랑이격인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 밤잠을 재우지 않는 이 사회의 무한경쟁시스템이며, 현장교사의 소리는 묵살한 채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로 교육정책을 쏟아내는 오만한 교과부관료들이며, 등록금으로 배불리는 사립대학들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토해내는 한숨과 신음은 교원평가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다. 아이들을 체벌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무한경쟁’, ‘평가를 통한 교사통제’, ‘교육의 시장화’ 라는 세 개의 톱니바퀴 속에 갇혀 질식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부품으로의 삶을 강요당하다보니 우울하고 불행하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우리 사회가 배부른 투정으로 일축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즈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가장 힘든 건 물론 학생들이다. 밤잠을 못자고 해롱거리며 도처에 널려 있는 자극에 빠지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배출하는 아이들. 밑빠진 독에 물 붇는 사교육비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학부모. 이미 지쳐있는 학생들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하고 교육정책에서 소외된 채, 스스로를 지탱해왔던 교육적 신념을 버려가며 현장에서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는 교사들. 이는 우리 교육이 이제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심각한 신호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소생하는 길은 각각 다르지 않다. 하나다.

 이제 범사회적으로 우리 경쟁교육에 대해 심각한 논의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이지상 위원)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큰 지진이 있었네요. 2011년 3월 11일. 토호쿠(東北)지역. 진도 9.0. 후쿠시마 원전 파괴 방사능 유출. 희생자와 이재민은 얼마나 되는지 모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 우리에겐 무척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각 기관마다 마치 이 땅에서 일어난 재해처럼 들고 일어나 나눔을 강조했고 전파를 쏜다는 방송이면 죄다 ARS 걸어놓고 누가 많이 모으나 경연을 했지요. 이웃나라의 아픔에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살갑고 정다운 일이 없으니 무척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일본의 피해상황만 보도가 될 뿐 그 안에 살고 있는 재일 동포에 대한 뉴스는 한줄 찾기가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되었지요. 도쿄조선 중고급 학교는 강당이 무너졌고 센다이의 토호쿠 초 중급학교는 건물자체가 기울었다는데, 그래서 졸업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데 후쿠시마는 제2의 체르노빌이 되어 방사능 천지가 되었다는데. 그곳에도 조선학교가 버젓이 있는데 이미 4년 전 극우인사인 이시하라의 도쿄도에 빼앗길 뻔 했던 에다가와(枝川)조선학교를 되찾는 모금운동에 참여했던 내가 걱정이 없었다면 말이 안되지요. 이웃나라의 재해복구 성금이 600억원이나 모였지만 그 이웃으로 인해 차별받고 고통 받았던 또 다른 나에게는 단 한푼도 지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요 “거기에 조선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우리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1923년 9월1일 관동 대 지진입니다. 약 15분 동안의 지진 만으로 도쿄의 3/4이 폐허가 되었고 약 14만2천명이 사망할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때 터져 나온 민심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약 6000-9000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던 일은 잘 기억 하실 겁니다. 그날이후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어머니의 말 모국어를 잊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들던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날 이후 말문을 닫았습니다. 젖 먹던 시절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도, 고향땅 밟으며 재잘거렸던 수많은 조선말에 대한 기억도 다 지워야 했습니다. 고향집 주변에 사시사철 피었던 꽃의 이름과 이웃들의 정겨운 말투도 다 잊어야 했습니다.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한 그들에게 맘 놓고 조국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란 잠들기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가족의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20여 년을 더 살아 해방을 맞았고 그해 12월에만 일본 전역에 약 560여개소의 국어 강습소가 세워졌습니다.”

-졸저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중 -

 정체성 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나의 생활이 진창이 될 때면 술 한 병 들고가 잔 올리며 꺼이꺼이 울고 싶은 어머니의 무덤 같은 것. 일본인이 되어 넋 놓고 살아도 생에 단 한번이라도 꿈속에서나 만나는 고향의 바람에 살 부비고 싶은 것. 뼈와 살은 바꿀 수 있으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 이라는 피 때문에 그들은 학교를 세웠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모국어를 가보로 여기며 지난 60여년을 한결같이 교육 시켰습니다. 지난 3월 10미터가 넘는 대형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고 이어 방사능 경보로 온 마을이 텅텅 빈 그때도 후쿠시마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15명은 학교를 지켰습니다. 학교마저 비우면 언제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당장은 죽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보다 우선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학교는 폐쇄되고 인근 니이가타로 이전해야 합니다. 센다이의 토호쿠 조선학교는 무너진 강당 대신에 좁은 식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했습니다. 갓 입학한 어린 초급학교생 들은 갈라진 벽을 임시로 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진이 나고 나서 나보다 더한 조바심을 가졌던 김명준 (영화 “우리학교” 감독)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이대로 있지 맙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여럿이 모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지진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땅연필”


사진 출처 - 몽당연필

뜨거운 청년 배우 권해효와 꽃보다 아름다운가수 안치환. 그리고 늘 부족한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진달래 냄새 가득한 김명준이 집행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몽당연필”의 목표액은 기둥뿌리 두개. 조선학교가 다시 세워지는 그날 건물의 수많은 기둥 중에 두 개쯤은 아이들의 고향 남쪽이 전해주는 두 손의 온기로 세웠으면 하는 것이지요. 지진으로 갈라진 토호쿠 조선학교의 벽에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적은 글귀가 마음을 흔듭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그 글귀에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지난날 그때 만약 이곳 한국에 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면 우리의 아버지가 무서운 총칼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했다면 우리도 이역의 땅에서 핍박받는 조선의 아들, 지척의 갈라진 조국을 어머니로 여기며 오직 “통일” 두 글자만을 그리워하는 조선의 딸.

 사랑하는 아이들아
 고통은 극복 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나 그렇단다
 고통은 견뎌 내는 것. 그것도 웃으며 견뎌 내는 것
 그러니 이제 함께 견디자. 그리고 함께 지키자. 지진과 해일로 방사능 피해로 무너진 너희의 어깨를 아직은  튼튼한 우리의 어깨에 걸고

“대지는 흔들어도 함께 가자, 손잡고 가자 웃으며 당당하게 가자”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뽀빠이의 추억(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득바득 살림을 일구던 부모님은 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여력까진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소꿉놀이를 했다. 나에게도 소꿉친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했다. 우리는 뒷산에 올라 진달래를 따먹었다. 여자 아이는 풀잎 뒤에 매달린 달팽이를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배시시 웃었다. 여자 아이가 하자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자”고 여자 아이가 말했다. 교회에 가면 돈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유치원이 있다고 했다.

 지방 도시의 교회에는 널찍한 강당이 있었다. 코흘리개들은 마룻바닥에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점심 무렵이 되면, ‘뽀빠이’를 나눠 줬다. 라면을 구워 만든 과자였다. 과자 봉지 안에는 작은 ‘별사탕’도 있었다. 그저 입에서 스스르 녹는 별사탕은 별천지였다. 별사탕을 먼저 먹을지, 나중에 먹을지 항상 고민이 심했다. 뽀빠이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별사탕이 있기 때문이다.

 뽀빠이 때문에 그 아이와 멀어지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100여명의 코흘리개들이 오직 뽀빠이만 쳐다보고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 어른들이 나눠주는 뽀빠이는 항상 부족했다. 뽀빠이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쟁탈전이 치열해졌다. 아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우르르 몰려 들어 어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센 아이들은 꼭 뽀빠이(그리고 별사탕)를 차지했고, 숫기 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렸다. 어떤 아이는 울었다. 어른들이 말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내일은 꼭 (뽀빠이를) 받을 거야.” 그건 옳지 않았다. 힘이 약한 아이들도 과자를 받을 수 있도록 줄을 세우고 차례를 정하면 부족하나마 공평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교회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성들여 기도하고 또다시 뽀빠이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나는 보았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뽀빠이를 매일 받아먹을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교회를 드문드문 나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한 아이는 그런 나를 타박했고, ‘뽀빠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아이에게 나는 서운했다. 우리는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헤어졌다. 그 아이가 이사를 갔다. 이사 가던 날, 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콧물 흘리는 지저분한 사내 놈들과 구슬치기를 시작했다. 사내 녀석들은 진달래 대신 솔방울을 모아 전쟁놀이를 했다.

 뽀빠이의 기억이 도드라지는 때가 있다. 해외 취재 때, 현지 한인 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취재에 도움을 준 교민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뽀빠이 문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지 30여년만에 교회에 나간 셈인데, 또 한번 놀랐다. 목사의 설교는 “요즘 한국 교회에서 이단 종파가 ‘잠입’해 장로와 집사 자리를 차지한 뒤, 목사를 몰아내는 사태”에 대한 개탄과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험담과 “그런 일이 우리 교회에선 없을 것으로 믿는다”는 당부 섞인 경고가 주를 이뤘다. 나는 예배가 편치 않았다. 사랑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증오의 언사만 귀에 담은 듯 했다. 뽀빠이의 기억은 정화되지 못했다.

 나는 믿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믿기보다 의심하는 일을 주로 한다. 다만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 사상·양심의 자유의 맥락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것은 각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침의 영역이다. 나의 사상·양심·종교를 잣대로 타인의 사상·양심·종교를 타박하면 안 된다.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형태를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과 명절 차례를 거부하는 개신교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가톨릭의 금기와 습속을 나는 진심으로 존중한다.

 다만 (모든 믿음을 존중함에도) 모든 믿음을 좋아하진 않는다. 예컨대 교회의 붉은 십자가 전광판은 ‘싫다’. 밤거리를 헤매는 노숙자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부족한 전기를 쏟아 부어 홍등가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주택가 곳곳에 밝혀야할 이유가 없다. 밤마다 문을 걸어 잠그는 교회에 왜 유혹의 네온사인이 필요하겠는가. 예컨대 대통령의 기도는 ‘싫다’. 대통령이라면 공개석상에서 반복적이고 노골적으로 특정 종교의 기도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교분리 원칙이 엄연한 헌정국가의 수반은 헌법의 경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일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종류의 중층적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유독 대통령은 오직 목사의 시선만 의식하며 사는 것 같아 ‘싫다’.

 낮은 곳에 임하여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목사·장로·집사·신도가 있는 것을 안다. 비종교인인 내가 종교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할 때다. 그러나 헌신과 사랑이 아닌 것을 향하여 기도할 때, 나는 그 종교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종교는 인격으로 현현한다. 어느 종교건 믿음을 가진 자들이 믿음을 바탕으로 사람의 힘을 입증할 때, 그 믿음이 빛난다고 나는 믿는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기독교도와 불교도와 무슬림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코란을 끼고 인질을 참수하는 무슬림은 싫다. 신도 머릿수대로 가격을 매겨 교회 매매 광고를 내는 목사는 싫다. 신도들의 돈을 받아 외제차를 몰고 산사를 드나드는 스님은 싫다.

 이런 일반론에 입각해 두루 평균적으로 봐주려 해도, 자꾸 목사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눈에 밟힌다. 다른 종교보다 월등한 ‘사회적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코흘리개들에게 뽀빠이를 먹을 수 있다는 당근과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를 던져놓고 기도를 익히게 하려했던 장로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박애와 봉사의 말씀 대신에 다른 종파에 대한 증오와 공격의 언사를 늘어놓는 목사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여론을 통한 성찰과 회개는 내팽개치고 하나님의 용서만 구하는 대통령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할리 없다고 나는 믿는다.

 올해 초, 일본 지진에 대해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무신론·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던 조용기 목사가 다시 기사에 등장했다. 교회 사유화 논란 끝에 물러나기로 했으나 사실은 순복음교회의 실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류의 재앙에 하나님의 경고를 들이대고, 신자들의 공동체여야 마땅한 교회를 집안 재산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습속이다. 그런 목사들이 가장 힘 있고 돈많은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한다면, 나는 그들이 믿는 신이 ‘싫다’. 그들까지 보듬어 안는다면 참 졸렬한 하나님 아닌가.

※ 웹진 <단비뉴스>에 실린 칼럼을 첨삭·보완한 글입니다.


전남대, ‘꽤’ 옹졸하다 -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현재 광주는 전남대학교에 있는 ‘헌혈의 집’ 문제로 시끄럽다. 중앙일간지에는 잘 소개가 안 되고 있지만 지역 언론에는 연일 관련 기사가 실릴 정도로 ‘뜨거운 감자’다. 급기야 정치권까지 가세해 북구의회가 유감을 표시하고, 시의원이 1인 시위에 나설 만큼 이슈가 되고 있다. ‘전남대학교 헌혈의 집’을 놓고 이전을 요구하고 있는 학교 측과 이전 불가를 주장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가 맞서고 있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전남대학교 후문 쪽에는 1997년에 생긴 ‘헌혈의 집’이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기부채납 방식으로 건물을 지었으며, 전남대는 3년간 무상사용을 허가했다. 이후 2009년까지 3년마다 계약을 갱신해 12년간 무상으로 사용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남대는 2009년 3월 광주전남혈액원에 ‘헌혈의 집’ 반환을 요청했다. 교육, 연구 공간의 부족이 이유였다. 그렇지만 광주전남혈액원이 재사용을 요구했고 전남대는 2011년 4월 30일까지 2년간만 연장을 허용했다. 당시 허가서에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경우 반환할 뿐 아니라 허가기간이 종료된 경우 원상회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전남대는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전남대의 요구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정당하다. 총장이 직접 나서 ‘정당한 재산권 행사’라고 강변하지 않아도 모두들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만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학교가 겉으로 내세우고 있는 ‘교육, 연구 공간의 부족’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헌혈의 집은 고작 건평 40평 정도에 지나지 않는 좁은 공간이다. 공간이 부족하다는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좁은 곳을 어떤 교육, 연구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학에서도 구체적인 사용계획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전남대 헌혈의 집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또 하나는 그간 전남대가 헌혈의 집을 홍보의 수단으로 잘 활용해왔다는 점이다. ‘전남대 헌혈의 집’은 전국 대학에 설치된 21개 헌혈의 집 중 헌혈 실적이 1위라고 한다. 이에 대해 모 교수는 “5·18정신의 현대적 승화”로 이해하기도 했다. 80년 광주에서 피를 나누었던 것이나 8-90년대에 불의에 저항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에 앞장선 것, 2000년대에 피가 부족한 이웃과 동료들을 위해 헌혈운동에 나선 것 모두 같은 봉사정신의 발로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대학이 이런 해석에 동의하는지는 모르지만 대학을 홍보하는데 있어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총장이 송년사에서 “4년 연속 헌혈 1위라는 영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전남대의 교시가 ‘진리, 창조, 봉사’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역에서의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전남대 구성원 5명 중 4명이 이를 반대하고 있지만 대학의 입장은 강경하다. 총장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반환을 거부하는 혈액원에 대해 “사람이 할 짓거리입니까?”라고 격앙된 어조로 얘기한 것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간 전남대의 배려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왔고, 대학 차원에서 헌혈을 독려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경영대 뒤쪽에 대학 소유의 25평 공간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그렇지만 유동인구를 고려하면 이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대안이다.)

 때문에 이토록 대학이 강경한 이유는 일종의 ‘괘씸죄’일 가능성이 높다. 혈액원은 2011년 4월 30일에 계약이 만료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2년 동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3월에 와서야 대학에 재사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동안 별다른 요청이 없다가 갑자기 재사용을 요구했으니 대학으로써는 뜬금없을 수 있다. 또 혈액원의 태도가 여론의 유리함을 등에 업은 ‘막무가내’로 해석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에서의 대학의 공적 역할이니 국립대가 가진 사명이니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지적한 ‘소탐대실’이라는 말이면 충분하다. 헌혈의 집이라는 좁은 공간을 돌려받고 지역사회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전남대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헌혈 전국 1위’가 가진 대학의 영예를 어떤 경제적인 가치와 바꿀 수 있는가? ‘봉사’를 교시로 삼고 있는 전남대에 남겨지는 오점을 무엇으로 치유할 것인가? 결국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얻을 게 없는 다툼을 끌고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전남대의 경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참 대학 못났다’라는 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제7기 대학생 인권학교 - 인권을 배우자, 그리고 행복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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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소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인권운동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활동을 거듭하고 있다. 수사부터 재판, 형 집행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공부하고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권현안에 대해서도 실천 활동을 하고 있다. 성공회대 겸임교수, 광운대 외래교수. 저서로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검찰공화국,대한민국>(공저) 등이 있다.

홍세화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2002년 귀국했다. 현재 르몽드 드플로마타크’ 한국 편집인,  ‘학벌없는 사회’ 공동대표, 월간 ‘작은책’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공저)> <생각의 좌표> 등이 있다.

하종강
한겨레신문 객원논설위원을 지냈으며 <노동과 꿈>대표 및 인천대 강사, 한국노동교육원 객원교수 등을 맡고 있다. 1994년 <항상 떨리는 처음입니다>로 제6회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고 저서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길에서 만난 사람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공저)> 등이 있다.

조광제
철학 전문 시민학교 <철학아카데미>를 설립한 뒤 현재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주로 몸 철학, 예술 철학, 매체 철학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의식의 85가지 얼굴>,<몸의 세계, 세계의 몸>,<주름진 작은 몸들로 된 몸>,<발기하는 사물들>,<인간을 넘어선 영화예술>,<존재 이야기>등이 있다.

오인영
단국대학교, 충남교육연구원 등에서 강의를 했고 현재는 고려대학교에서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과거의 힘 ; 역사인식, 기억과 상상력>,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 애국주의 한계 논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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