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인권콘서트 HUMAN 1st. -지금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뜨거운 감자의 인권 콘서트! HUMAN!!! 딱딱하고 어려운 ‘인권’이 아닌 즐겁고 쉬운 ‘인권’을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인권콘서트 ‘HUMAN’ 2009년 9월 20일 첫 공연부터 1년 동안 매월 진행되며 뜨거운 감자와 강산에가 격월로 출연해 즐겁고 쉬운 생활 속의 인권을 노래할 이번 콘서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첫번째 주자는 김C의 <뜨거운 감자> 입니다! 인권연대 CMS 회원은 특별한 할인혜택을 드립니다.(2/3 가격에 예매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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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C(뜨거운감자)의 인권콘서트에 초대합니다~!! 2009.09.02
- 형평성 잃은 검찰 ‘촛불백서’ (내일, 20090831) 2009.08.31
- ‘촛불배후’ 지목된 당사자들 “정권 입맛에 맞춰…검찰 개혁 필요성 자인” (경향, 20090831) 2009.08.31
- 내달 '흉악범DNA 국가관리' 입법 재추진… 찬반 가열 (세계, 20090830) 2009.08.31
-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한겨레21, 090828) 2009.08.31
- 8월, 슬퍼할 힘밖에 없다(한겨레21, 090828) 2009.08.31
-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해본다(이동화/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2009.08.27
- 행동하는 양심(위대영 위원) 2009.08.27
김C(뜨거운감자)의 인권콘서트에 초대합니다~!!
형평성 잃은 검찰 ‘촛불백서’ (내일, 200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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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명 입건 사회손실 3조7513억 …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 등이 원인 검찰, 불법필벌 범정부적 대응 주문 … 시민단체 “정부의 일방적 시각” 검찰이 ‘미쇠고기 수입반대 불법 폭력 촛불시위’ 백서를 펴냈다. 서울중앙지검이 발간한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8월까지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2398회 열렸고 참가 인원만 93만2000여명에 달했으며 이 기간 동안 불법 폭력시위 혐의로 1347명이 입건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검찰은 폭력을 행사하거나 이를 선동한 42명을 구속 기소하고 14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또 1001명은 약식 기소했으며 나머지는 기소유예나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시위 진압에 동원된 경찰력은 연인원 68만4540명(7607개 중대)으로 시위대와 충돌해 501명이 부상을 당했다. 중상자는 100명에 달했다. 경찰 차량과 장비 2275점이 파손돼 10억9000만원의 물적 피해액이 발생했다. ◆의사표현도 법 테두리 내에서 = 촛불시위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피해액이 3조7513억원으로 추산됐다. 직접적인 피해액이 총 1조574억원으로 생산 손실 356억원, 경찰서의 관리비 등 공공지출 손실 840억원, 시위 장소 부근의 영업손실 등 제3자 손실액이 9378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간접피해는 사회 불안정에 따른 거시 경제적 비용, 공공개혁 지연에 따른 비용 등 총 2조6939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검찰은 이같은 미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발생 원인으로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감 증폭, 인터넷 등에서 퍼진 광우병 관련 미확인 정보와 허위사실, 촛불시위에 대한 위법성 인식 부족, 시민단체의 조직적인 시위 주도 등을 꼽았다. 향후 대책으로 검찰은 수사와 정책측면에서 엄정한 대응을 주문했다. 우선 집회신고 수리요건을 엄격히 해석해 운영하고 불법 폭력 집회 및 시위에 대해서는 해산위주의 방어적 방식에서 적극적으로 선제적인 해산 및 검거 위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또 불법 폭력행위자에 대해 불법필벌 원칙을 확립하고 폭력시위 배후세력을 철저히 규명,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정책적 측면에서는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범정부적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과 관련된 정책에 대해서는 입안단계부터 갈등영향 평가를 실시하고 이해당사자 등이 참여하는 공청회 등을 개최,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환균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은 “사회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왔으나, 집회시위 문화는 아직도 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기본적 법규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의사표현의 자유도 법과 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행사돼야 한다”고 밝혔다. ◆객관성 없는 사회적 피해규모 =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검찰의 촛불시위 백서가 일방적인 시각만을 반영해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검찰이 촛불시위를 통해 얻은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백서를 발간했다고 해놓고 정작 정부가 사과한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은 촛불시위의 배경으로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와 광우병 관련 허위사실 등을 거론했으나, 미쇠고기의 수입재개 결정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도 국민에게 사과할 정도로 인정했는데도, 한마디 설명도 없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부풀려진 피해규모도 논란거리다. 백서는 지난해 9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낸 보고서를 근거로 삼았지만, 연구원의 성격 때문에 당시에도 객관성을 의심 받았었다. 더욱이 주변 상인들의 피해 산출이 관련 업종 종사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계산한 것으로 인해 조사기법 자체도 인정받지 못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정부는 오류가 없고 시민사회만 문제가 있다는 시각은 국민들을 깔보는 처사”라며 “국가기관의 백서는 객관성과 공정성이 담보돼야 하는데 이번 백서는 기본적인 것들이 빠져 있어 검찰 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재인식시켜 주고 있다”고 말했다. 선상원 기자 won@naeil.com |
‘촛불배후’ 지목된 당사자들 “정권 입맛에 맞춰…검찰 개혁 필요성 자인” (경향, 20090831)
검찰 백서에서 ‘촛불시위’를 과격한 폭력집회로 변질시킨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당사자들은 “정치검찰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자기 고백서”라고 평가했다.
MBC
‘촛불시위’ 당시 국민대책위원회 조직팀장을 맡았던 안진걸 참여연대 사회경제국장은 “국민이 아니라 권력과 정권에 충성할 거리를 찾아 알아서 움직이는 검찰의 모습을 또 한번 보여주는 것”이라며 “국가 예산과 공무원을 동원해 이런 백서를 만들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진정 원하는 부패 수사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불순세력의 선동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왜 두 번씩이나 사과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서 “정부는 오류가 없고
법원은 시위사범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법원의 한 관계자는 “검찰의 기소 내용과 증거, 피고인의 입장 등을 종합해 법률에 의거해 판단한 것일 뿐 사견은 없다”며 “검찰은 자기 판단만 옳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견해도 존중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현철기자>
내달 '흉악범DNA 국가관리' 입법 재추진… 찬반 가열 (세계, 20090830)
“재범 우려라는 측량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위험만으로 범죄자 DNA를 채취하는 것은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오창익 인권시민연대 사무국장)
범죄자의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가 관리할 수 있는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이 9월 정기국회에 제출된다. 흉악·강력범죄로 형이 확정된 수형자나 구속 피의자의 DNA 시료를 채취해 그 정보를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06년 법무부가 입법을 추진하다 무산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5월 법무부는 관련법을 다시 입법예고한 뒤 연내 입법을 추진 중이어서 인권 침해 논란이 재연될 전망이다.
![](http://www.segye.com/content/image/2009/08/30/20090830001097_0.jpg)
그러나 대상자가 재판에서 무죄 또는 ‘공소기각’ 판결을 받거나 검찰에서 ‘혐의 없음’ 등 불기소 처분을 받으면 해당 정보는 삭제된다. 또 관련 업무 종사자가 정해진 목적 외에 정보를 사용하거나 제삼자에게 제공 또는 누설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했다.
![](http://www.segye.com/content/image/2009/08/30/20090830001098_0.jpg)
혜진·예슬양 실종·피살사건(2008년 3월), 전직 프로야구 선수의 4모녀 살해사건(2008년 3월), 제주 초등학생 성추행 후 살인사건(2007년 4월), 인천 초등생 유괴살인사건(2007년 3월), 용산 아동 성추행 후 살인사건(2006년 2월),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사건(2009년 2월) …. 이들 범죄는 잔인한 살해수법뿐만 아니라 어린이, 부녀자 등 피해자도 가리지 않아 충격이 더 컸다. 이숭덕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인권의 가치를 어느 곳에 우선시할 수는 없지만 범죄자 등의 인권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수사편의주의적 발상=그러나 여전히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무엇보다 헌법상 보장된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인권단체들은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나 구속 피의자들에게까지 DNA 정보를 채취하는 것은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는 수사기관의 편의적 발상”이라고 주장한다. 또 채취 대상자들이 구속된 피의자나 수형자라고 해도 이들이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지른다는 보장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즉 재범 우려는 측정할 수 없으므로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수사기관이 주장하는 것처럼 연쇄살인 등을 예방할 수 있는 적절한 억제수단인지도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우승·김정필 기자 wslee@segye.com
기사입력 2009.08.30 (일) 20:32, 최종수정 2009.08.30 (일) 20:31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한겨레21, 0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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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확고한 인권 신념 지켜온 사형수 출신 대통령… 국가인권위 발족과 실질적 사형제 폐지 길 닦는 업적 남겨 | ||||||||||||||||||||||||||||||
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살해 위기를 겪었다.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1980년 9월17일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고난 속에서 인권 철학이 뿌리내렸다.
지난 2005년 2월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연세대 교정을 찾았다. 연세대 리더십센터의 초청으로 한·미·중·일 네 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1천여 명의 학생이 ‘동아시아와 젊은 리더십’이란 주제의 강연을 경청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던 때를 회상했다.
재판장 입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한없이 절박했을 생사 갈림길에서의 고뇌는 ‘입이 튀어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라는 말과 웃음으로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인생에는 그런 유머로 넘기기에는 너무 엄혹하고 절박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이 언급한 1980년 신군부 군사재판에서의 내란음모 혐의 사형선고를 비롯해, 1971년 목포에서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 1973년 일본에서의 납치·수장 위기까지…. 하지만 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군사정권의 도 넘은 탄압은 자연스레 그를 인권 수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인권 탄압 피해의 상징과 인권 수호의 상징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인권의 중요성과 인권 향상의 절박한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인권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만들어갔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돼 인권과 관련해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사형제 폐지 노력을 들 수 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는 김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자신의 임기 중인 2001년에 출범시켰다. 출범 준비 단계에서 국가인권위의 위상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시민사회단체 쪽과 갈등을 겪긴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자체는 우리 사회 인권 향상의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국가인권위는 지난 8월18일 김 전 대통령 서거 2시간여 만에 “김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이셨습니다. 고인이 목숨을 바치며 추구했던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라는 추도문을 냈다. 김 전 대통령과 인권을 잇는 또 다른 축인 사형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우선 본인 스스로가 1980년 9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출신이다. 김형태 변호사(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는 “1992년 대선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선 주자들을 불러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확고하게 사형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며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사형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빠져죽을 뻔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이 사람 목숨을 뺏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제도가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사형제 반대의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그는 2006년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기고문에서 “보다 우려되는 것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주창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는 수단으로 사형제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혁당의 가담자들이 잘못 기소된 뒤 사형됐고 나조차도 사형 언도를 받고 거의 사형에 처할 뻔했다”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사형제 폐지 활동 나서
하지만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신념은 개인의 경험 이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는 “그분 자신이 해방 뒤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기에 형벌로서의 사형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며 “1973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사형폐지·고문철폐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도 (김 전 대통령이) 열심히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앞서 언급한 기고문 서두에서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규정한 뒤 “민주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하는 것이며, 생명을 끊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인권의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형과 범죄 감소율은 무관한 점 △당사자로 하여금 범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기회를 줄 수 없는 점 등도 반대 이유로 지적했다. 사형제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신념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기간 단 한 번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표출됐다. 또 이런 정책 기조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운동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23명의 사형을 한꺼번에 집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업적은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김 전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의석수 또는 ‘국민 감정’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두 차례 정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형수·양심수와 관련해서만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진정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제 폐지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본인은 사형제를 폐지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는 못해 실질적 폐지라는 첫 단추를 끼운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15대 국회 이후 매번 제출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으며, 17대 국회에서도 절반이 넘는 175명의 국회의원이 사형제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민적 여론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누명 썼던 외국인 사형수 본국 돌려보내
인권운동가들은 살인 누명을 쓴 외국인 사형수 2명을 모국으로 돌려보낸 것도 사형제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파키스탄인 모하메드 아지즈와 아미르 사밀은 동료 파키스탄인을 살해한 혐의로 1993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편지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도록 진술을 사주한 또 다른 파키스탄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답변만을 내놓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이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하면서 국외 추방 형식으로 고국에 돌려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뿐 한국인이 개입된 사건이 아닌 만큼 감형 뒤 본국으로 추방해 파키스탄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은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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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슬퍼할 힘밖에 없다(한겨레21, 0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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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23, 영면하다] 5월 반쪽이 무너진 뒤, 8월 다시 무너진 반쪽…분향소엔 저항의 분노보다 애도의 정념이… | ||||||||||||||||||||||||||||||||||||||||||||||||||
2009, 8, 23, 영면하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생정에 그사 존경하고 사랑하던 국민들의 오열 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원으로 향했다.
고작 87일이 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고 석 달도 안 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또다시 눈물로 젖었다. 시민들은 ‘데자뷔’를 느끼며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치러냈다. 그때와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냈다.
예우의 차이, 규모의 차이
한 달간 뉴스는 ‘위독’과 ‘안정’ 사이를 오갔으나, 8월18일 오후 1시43분 끝내 모두 무너져내렸다. 서울광장 분향소로 모여든 조문객들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된 것과 마찬가지”라며 김연선(42)씨는 분향소 앞에서 흐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은 엄마가 울자 눈을 끔벅였다. 아이들은 아직 엄마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다. 김씨는 아이들을 보며 더 서럽게 울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지도자를 잃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답답해 잠도 안 온다”는 김씨에게 두 사람의 상실은 ‘미래의 상실’이다. 그러나 5월의 상실과 8월의 상실은 다르다. 5월,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는 항상 촛불이 있었다. 분향을 마친 이들은 경찰을 굳이 밀쳐내고 거리와 광장에 나서려 안간힘을 썼다. 8월, 김 전 대통령 분향소에 그런 안간힘은 없다. 서거 다음날인 8월19일, 정부는 서울광장에 공식 분향소를 열었다. 첫날에만 시민 1만여 명이 조문했다. 시민들은 대부분 분향을 마친 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광장을 떠났다. 촛불을 들지도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영정 사진을 보며 조용히 눈시울만 붉혔다. 5월의 열정과 8월의 차분함 사이에는 ‘예우’의 차이가 있다. 대학생 김민석(25)씨는 지난 5월, 분향을 마치고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국장으로 예우해주지 않는 정부가 미웠다. 이번엔 다르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겠다고 8월19일 발표했다. “민주화의 상징인 큰 분이 돌아가셨으니 국장으로 잘 모셨으면 한다.” 김씨는 담담하게 분향소를 떠났다. 정부의 예우는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정부는 서울역에 공식 분향소를 마련했다. 이번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는 그때보다 3배 이상 넓다. 넓어진 공식 분향소는 ‘시민 분향소’가 들어설 여지를 밀어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토론 게시판에 “시청 앞으로 모이자”는 누리꾼들의 글이 올라왔다. 8월18일부터 이틀간 시청 앞 광장 한쪽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졌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했다. 시민들은 시민 분향소 옆의 공식 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5월엔 분노, 8월엔 기억 ‘김대중 팬클럽’ 회장이라고 밝힌 한 노인이 8월19일 오후에 찾아왔다. “한 곳에 두 개의 분향소가 있으니 좋지 않아 보인다. 옆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시민 분향소는 두세 차례에 걸쳐 구석으로 밀려났다. 시민 분향소를 지키던 10여 명의 시민은 이날 저녁 자진 철수를 결정했다. “어르신 장례를 국상으로 잘 치르는데 괜한 불협화음이 날까봐 치웠다”고 분향소 지킴이 엄아무개(44)씨가 말했다.
‘시민 분향소’의 쇠락은 저항의 정념과 애도의 정념 가운데 뒤엣것에 무게가 실렸음을 웅변한다. 지난 5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시민 분향소에는 일주일간 100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몰렸다. 지척의 거리인 서울역과 역사박물관에 ‘공식 분향소’가 있었지만, 한사코 대한문 앞에서 서너 시간을 줄서 있다 분향했다.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려 드는, 오히려 보란 듯이 해버리는 태도를 저항이라 부른다. 5월, 사람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조문을 통해 현 정부에 저항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그런 국면은 아니다. 나라의 큰 어른인 김 전 대통령이 고령이고 병원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국민이 차분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도와 저항은 원래 한 몸의 반쪽이다. 세상을 떠난 이를 슬퍼하는 마음은 그를 핍박했던 이에 대한 증오와 통한다. 5월에는 증오했으나 8월에는 그저 슬퍼하기만 한다. 어쩌면 슬퍼할 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남대를 졸업한 현인(51)씨는 대학 2학년 때 5·18 민주화 항쟁을 겪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던 김대중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공장 해고자 남편을 따라 복직 투쟁에 참여했던 오미령(54)씨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회고한다. 기억은 역사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조문을 온 이수길(35)씨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5·18 민주화 항쟁과 관련한 비디오를 보여주시며 김대중 선생님 얘기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재용(24)씨는 “어릴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중학교 1학년인 김민희양도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것을 듣고서 조문을 왔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마도 그것이 저항보다는 애도, 분노 대신 기억을 이야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5월의 분향소를 찾았던 20~30대에게 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인’이었다. 8월의 20~30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전설’이다.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그를 추억하는 40~50대가 많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아무래도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1세대이다 보니 젊은이들 입장에선 노 전 대통령보다 조금 낯설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종산(48)씨는 “노 전 대통령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일꾼’ 같은 존재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생’과도 같았다”며 “노 전 대통령을 잃은 당시는 ‘동지’를 잃은 허탈함이었고, 지금은 ‘선생’이 사라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동지를 잃으면 복수한다. 어른이 돌아가시면 애도한다. 이 땅에 수천 년간 내려온 추모의 법도다. 2009년, 한국인들은 같은 추모의 정념, 조금 다른 법도를 따라 두 대통령을 차례로 보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시민 분향소도 없고 촛불도 없고 100만 인파도 없으니, 서울시청 앞 경찰들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러나 데모가 없다고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선생을 애도하는 슬픔은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이명박 시절은 여기에 이르러 거대한 지표석 두 개를 갖게 됐다. 역사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세 명의 대통령을 기록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 지표석은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꽂혔다. 서울광장 분향소 한쪽에 어느 소녀가 붙였음직한 노란 쪽지가 있다. “용기와 희망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그 옆에서 펼침막이 펄럭인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그것은 강력한 촉구가 되어 차분한 조문객들의 뇌리에 남는다. 신광영 교수는 “추모 분위기는 침착하지만, 민주화 1세대 지도자의 죽음이 사회 전체에 주는 울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보다)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특히 “이제부터 새 시대에 맞는 새 인물에 대한 담론이 촉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 국민이 고아가 됐다”는 추모객의 흐느낌은 그래서 하나의 선언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버지를 찾아나설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끌 새 지도자를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볼 것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김하늬 인턴기자·이영은 인턴기자 |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해본다(이동화/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태어난 곳만 서울이고 어렸을 때부터 대학시절을 대부분 호남지역에서 보낸 나는 호남지역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오죽하면 호남에서의 ‘김대중 정서’가 타 지역의 ‘반 김대중 정서’를 불러 일으켜 대선 낙방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을까. 어쨌든 나 역시 그에 대한 정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대학원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고, 운동을 지속하고 있던 나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현안 이슈들로 인하여 당시 정권과 각을 세우며 심심찮게 “김대중 정권 퇴진하라” 라는 구호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다른 정책들보다도 이라크 한국군 파병으로 인하여 당시 이라크에 있었던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칼날을 세우며 노무현 정부를 비난했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게 운명을 달리 하신 직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고 그 슬픔에 적지 않은 당황까지 하였다. 아마도 당시 흘렸던 눈물은 정치를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구조적으로만 본 점과,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로만 사로잡혀 있었던 자신에 대한 원망과 반성 그리고 감성의 것인 듯싶다. 그러나 솔직히 감성 그 이상을 넘어선 내 스스로 완벽히 인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종합적인 지점에서의 반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3달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신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하며 당혹감과 아쉬움과 슬픔이 또 한 번 가슴속을 지배하고 있다. 이 두 전직 대통령 시절에도 운동을 하며 집권자들에게 비판과 비난의 목소릴 냈으며, 지금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현재의 대통령에게도 내용과 정도만 다를 뿐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가슴속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당혹스럽다. 정말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이후에야 스스로에게 명확한 설명이 되겠지만 지금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이다. 아마도 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지금 최소한 나에게 두 분의 전직 대통령과 현재의 대통령이 같은 반열에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스스로 원치는 않지만 요 며칠 방송과 신문에서는 드라마틱했던 두 전직 대통령의 개인사를 내비치면서 계속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 ‘민주주의’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는 ‘민주주의’는 현재 2009년을 지나면서 극적으로 그 의미와 정의가 재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사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뜻을 누가 모르겠냐 싶지만 이토록 익숙했던 단어가 요즘처럼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평소에는 몰랐다가 희박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상투적인 문장으로 정리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해서 원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지금에 와서야 이것마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만이라도 없는 이 사회가 얼마나 억울한지 느끼고 있다. 이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느낄 수 있는 이것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전진되었던 민주주의였다.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 할 수 있었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없어서 쩔쩔매지 않았던 그것은 불완전한 민주주의였다. 동의하지 않고 문제가 많다고 믿었던 그 정부정책들도 어느 정도 민의(民意)를 두려워했고 여론을 참고했던 이유는 그동안 존재감이 없었던 민주주의였다. 아마도 백가지 이상이나 있을법한 대통령에 대한 평가기준들 중 현재 내가 두 분의 전직대통령이 사망한 사실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유는 이 ‘민주주의’가 뒤로 돌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민주주의’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도 힘든 이 험난한 시기에. 이 글을 빌어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부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
행동하는 양심(위대영 위원)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계속되는 야근에 힘이 부쳤는지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로와 면역력 약화가 원인이라고는 하는데 아무튼 시쳇말로 나이롱환자 노릇하느라 일주일을 허비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 중 아침에 한차례 회진을 도는 교수와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오면, 그들의 말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혈압·체온 체크를 하러 오면 그 결과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이 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게차에 다리를 깔려 뼈가 부러진 분, 자동차 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치신 분,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하다 발목 관절을 다친 분 등등 많은 환자들이 의사들의 말 한마디를 신주단지 모시듯 따르고 조심조심하는 모습을 보며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느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기간이 끝나고 또 다시 일상의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이 무너져 버린 몸을 이끌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평화를 위해 남은 생의 불꽃을 태우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서거에 임해서이기는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보면서 완벽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내 생에 이런 정치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으로서 욕심이 없었을 리 없겠지만 그 깊은 곳에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국민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땅을 일구는 농부의 손길에서 먹거리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진정한 농심을 찾게 되고,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를 어루만져주는 의사의 손길에서 진정한 의술을 찾게 되며, 가난과 고통으로 시름하는 국민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정치인의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게 됩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업무 분야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기계가 대신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세분화될 일자리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업무수행 능력을 요구받고 있고,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업무처리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객관적이고 고도화된 업무능력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누구 하나 전문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단 하루도 지탱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전문가는 제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부 전문가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그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대상을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그동안 쌓아 온 모든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경찰 전문가들은 시민을 상대로 폭압적인 살인 진압을 자행하고, 국가가 국민의 세금을 들여 양성한 법률 전문가인 검사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를 말살하는데 그들이 가진 온갖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또 매일 매일 TV 속에 그려지는 정치 전문가들의 행태를 통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찾기는 어려운 반면 자본가들과 기득권자들만이 보이는 것은 저만의 편견은 아닐 것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로지 신뢰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이. 그 자리를 채울 신뢰를 어떻게 다시 쌓아갈 것인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전문가로서 맡은 소임이 일반 대중, 시민,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로서 쌓아온 실력을 왜곡된 방향으로 사용할 때, 이를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사회를 지탱해나갈 신뢰, 훼손되고 실추된 신뢰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모습이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 아닐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