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대가 매월 네 번째 수요일 저녁에 여는 <수요대화모임>의 8월 초대 손님은 문화콘텐츠 제작자 겸 성공회대 겸임교수 탁현민님입니다.

 최근 MBC의 제한규정에 항의하는 출연거부 의사를 밝히고, ‘삼보일퍽’이라는 1인 시위를 진행하신 탁현민님을 모시고, ‘상상력에 권력을’이란 주제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되, 즐거울 수 있는 집회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오세훈은 어쩌다 오세이돈이 되었나(이재성 위원)

- 한 정치인의 우생학적 퇴화에 관한 짧은 기록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회의원 시절의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종로 담당 사건기자였고, 오 시장은 막 국회의원에 당선된 새내기 정치인이었다. 환경운동연합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그와 합석하게 됐다. 한나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그는 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서 나름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피 끓는 청년이었던 나는 대놓고 물었다. “왜 하필 한나라당이냐”고. 그리고 내친김에, 김영삼의 신한국당과 전두환의 민정당, 박정희의 공화당, 이승만의 자유당 등 한나라당의 뿌리를 언급했던 것 같다. 친일파와 군사독재의 본산이라는 말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뜻은 통했을 것이다.

 조용한 카페였고, 환경운동연합 사람들과 함께 간단히 맥주를 마시는 자리였는데, 뜻밖의 질문을 받은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뭐라 반박도 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아직 한나라당 입당의 논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명분이야 애초부터 있을 턱이 없었다. 정치를 하고 싶긴 한데,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그런 시선을 의식해서였을까, 국회에 들어간 그는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과 보조를 맞춰 당을 개혁하려고 했다. 5·6공 세력 용퇴를 주장하며 17대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는 약간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런 개혁 이미지 덕에 그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됐고, 강금실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시장에 당선됐다.

 서울시장이 된 그가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정책은 ‘현장시정추진단’ 신설이었다. 서울시 공무원 3%를 일률적으로 솎아내 쓰레기 줍기 등 허드렛일을 시킨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줘 스스로 그만두게 하려는 구조조정 방안이었다. 철밥통 공무원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대중적 인기를 얻어보려는 책략이었다. 그러나 사상 최악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방식에 공무원들은 경악했고, 여론의 지지도 시원치 않았다. 아마도 우익 인기영합주의자로서 오 시장의 면모가 처음 드러난 시점이었을 것이다. 이때 생긴 오 시장의 별명이 다섯살훈이다.


파괴된 서울시청사의 모습

 오 시장이 도덕이나 원칙, 역사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내 드러났다. 이른바 서울시 청사 기습 파괴 사건이었다. 서울시 청사를 리모델링하려는 서울시와 갈등을 빚던 문화재위원회가 등록문화재인 서울시 청사를 사적으로 격상시키려하자, 서울시가 건물 일부를 기습적으로 부숴버린 것이다. 풍납토성 유적 발굴지를 훼손했다고 경찰에 입건됐던 재건축아파트 주민들이 혀를 내두를 일이었다. 나는 이 사건이 오 시장의 사람됨을 판단하는 중대한 시금석이었다고 본다. 자신에게 득이 된다면 문화재든,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든 내팽개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시장으로서 이렇다 할 치적이 없던 오 시장은 본격적으로 이명박 따라 하기를 시작한다. 청계천 복원을 흉내낸 한강르네상스, 서울광장을 흉내 낸 광화문광장(잔디와 콘크리트의 차이?), 대운하 사업을 흉내낸 경인아라뱃길, 노들섬 오페라하우스(이명박 대통령이 구상만 밝히고 임기 내에 실행에 옮기지 못한)를 흉내낸 세빛둥둥섬 등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토건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대선 성공 모델인) 전임자의 길을 좇아 대권을 향한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 시장에게는 이명박 같은 천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광화문 광장이 완공되자마자 하늘은 집중호우를 뿌려 광화문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올해는 광화문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곳곳이 쑥대밭이 됐고, 급기야 우면산마저 무너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시민들은 오세이돈이 경인 아라뱃길 사업으로 서울을 베네치아처럼 만든다더니 진짜 물바다로 만들어버렸다고 비난했다. 오세이돈과 더불어 오잔디라는 별명도 얻었다. 서울광장 잔디를 새로 깔자마자 큰비에 둥둥 떠버렸기 때문이다. 세빛둥둥섬은 개장 행사인 모피 패션쇼 뒤 문을 닫았다. 누리꾼들은 세금둥둥섬이라고 불렀다.

 정확히 말하면, 오세훈의 불운은 단순한 천운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아둔함에서 기인한다. 이명박의 청계천은 비록 짝퉁이긴 하지만 ‘복원’이라는 환경 운동적 화두에서 출발한 사업이었다. 서울광장 역시 민주적 도심 공간 마련이라는 관점에서, (잔디 광장이라는 형태로) 왜곡되긴 했지만, 일정정도 서울시민의 바람을 담아낸 것이었다. 이명박은 자신의 전공을 십분 살려, 당시 시대적 화두였던 ‘환경’을 ‘토건’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오세훈의 토건사업에는 아무런 논리도 파토스도 없다.

 요즘 뜨거운 논란의 대상인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도 마찬가지다. 오 시장은 이번에도 시대정신을 놓치고 있거나, 거꾸로 읽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였던 시절, 환경이 화두였다면 지금은 복지가 화두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7일 오전 서울 을지로입구역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오는 24일 실시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홍보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복지가 화두로 떠오른 것은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반(反)신자유주의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고삐 풀린 시장독재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가 전 지구적 과제가 된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전의 복지 확대론은 대한민국의 경제규모에 걸맞는 수준의 복지를 확충해, 경제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수준이었지만, 금융위기 이후 좀 더 근본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시대적 흐름을 역행했다. 부자감세와 재벌 몰아주기(고환율·법인세 삭감·4대강) 정책으로 재정은 바닥나고 (고환율 정책의 결과) 물가는 치솟고 있다. 700조원의 가계부채와 폭등하는 전셋값, 악무한적인 사교육비 등등 서민생활은 파탄으로 내몰리고 있다. 복지 관련 예산은 되레 깎았다.

 전통적인 가정이 빠르게 붕괴하는 가운데 아이 하나 키우는 일은 전쟁이 된 지 오래다. 저출산은 국가적으로 생산력 저하의 문제겠지만, 가계로서는 가장 직접적이며 비통한 생존의 선택이다. 무상급식을 넘어 무상보육과 반값등록금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국가가 제도로 책임져주지 않으면, 그런 국가를 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고 있다.

 오세훈의 결정적 패착은, 유권자들에게 생존의 문제가 된 복지정책을 대권가도의 재료로 바라본 것이다. 진보 교육감들의 무상급식 공약이 진보진영의 뜨거운 호응을 얻는 걸 보면서, 오 시장은 여기에 각을 세운다면 보수진영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덫에 걸린 것이다. 그가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천명하자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바보 같은 짓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후 한나라당은 선거에서의 유불리와 이념적 선명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이 마당에 무상보육을 실시하겠다는 정책을 들고 나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라 안되지만 무상보육은 필요하다는 황 원내대표의 논리는 전 국민적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오 시장은 주민투표 안건을 이리저리 바꿨다. 스스로 주민투표의 불필요성을 인정한 꼴이다. 차기 대선 불출마도 선언했다. 시민들은 그가 차차기를 노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말이다. 오꼼수라는 별명만 하나 더 얻었을 뿐이다.  

 오 시장은 이제 대권 욕심에 눈먼 정치인을 넘어, 정치적 무뇌아로 인식되고 있다. 영리하게도 좌파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복지에 한다리를 걸치며 민심의 눈치를 보는 박근혜와도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오 시장은 마키아벨리스트 중에서도 급이 낮은 저질 마키아벨리스트다.

 재미있는 건, 그런 오 시장을 이명박 대통령은 어떻게든 도우려 한다는 점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해야 하나. 오 시장과 이 대통령에게 관중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중국 춘추시대 철학자 관자의 어록 중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스스로 물어보라. 이 중 어디에 해당할지.

“왕도의 주군은 백성의 지지에 승부를 걸고, 패도의 주군은 군대의 지지에 승부를 걸며, 쇠퇴하는 주군은 지배계급의 지지에 승부를 걸고, 망하는 나라의 주군은 여자나 보석에 승부를 건다.(王主積于民 覇王積于將士 衰主積于貴人 亡主積于婦女珠玉)” <관자> 「추언편」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오리무중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2005년 28사단 GP 총기난사 사건으로 8명이 사망한 지 6년 만에 해병대 총기사건으로 안타까운 젊은 청춘 4명이 또 목숨을 잃었다. 총기 사건 하루 전날에는 해병대 2사단 병사가, 일주일 후에는 해병대 1사단과 2사단에서 병사와 원사가 각각 자살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공여단 병사 2명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 직후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군 관계자들은 앞 다투어 진단과 대책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인에 대한 정밀진단 없이 사후약방문식의 진단과 처방이 난무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이 요구한 인권실태조사는 해병대사령관의 공문 하나로 거절당했고, 비전문가들로 구성된 대토론회는 발제문 하나 없이 “모범생인 줄 알았던 자식이 비행청소년이더라”는 말도 안 되는 장관의 잔소리로 끝을 맺었다. 며칠이 지나 이명박 대통령은 “체벌 자체보다도 자유롭게 자란 아이들이 군에 들어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는 발언을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군대가 과거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그보다 더 좋아진 사회에 우리 군이 적응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인식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헌법 제69조 취임선서에서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증진을 엄숙 선서’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세대 장병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인식이 이러함에도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국회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GP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윤광웅 국방부장관 해임안을 제출함과 동시에 현 원내대표인 황우여, 원희룡 의원 등이 앞장서서 이와 관련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해병대 총기 사건 이후, 야당인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국방장관 해임안과 국정조사권을 당론으로 채택하기는커녕 단 한 명의 의원도 이를 요구하지 않고 있어 국민들로부터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포기한 무능한 야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해야 하는 것은 문민우위 헌법 하에서 지고지순한 진리이다. 하지만 국회 국방위원회 차원에서 단 한 차례도 전군에 대한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한 바 없다. 야당은 지금이라도 해병대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방장관 해임안을 제출해야 하며,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군인권법과 국방감독관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민사회 전체가 군대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단 한 차례도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하지 않았고, 1950년대의 큰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87년 민주항쟁 이후에도 군대는 성역화 되다시피 방치되어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한 386들은 대부분 감옥살이로 군을 면제 받은데 따른 군대 문제에 대한 자기검열로 인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거대한 병영사회이며 군사주의 문화가 민간에 미치는 영향이 큼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변혁하지 않은 채 인권, 노동, 여성운동이 진일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지난 7월 5일 오전 해병대 장병들이 강화도 해안 초소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이 안치된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위해 들어서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한해 25만명 가량이 군에 입대하고, 그만큼의 인원이 전역을 하고 있다. 군 입대를 앞둔 예비 입영자들은 인생의 막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불안해한다. 전역한 예비역들은 ‘지금 군대는 군대도 아니다’라며 자신의 군 생활에 대해 거들먹거리는 식으로 불안을 부추긴다. 군대에서 당한 인권침해를 커밍아웃(?) 하거나 간증(?)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발상일까?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옹졸함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흔히 남자는 모름지기 군대를 다녀와야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포장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전혀 신성하지도 않고, 인간이 되기보다는 사육되어 길들여지거나 전역 한 후에 다시 군대 가는 악몽을 꾸는 등 무의식 속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왜곡되어 집단화된 남성동맹이 민족주의와 만날 때 집단적 광기를 발현하며 군가산점제 부활에 편승하여 여성과 장애인을 공격하기도 한다. 당당하게 월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하거나 전역 후 집단소송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찾고, 국가에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세상에 맞을 짓은 어디에도 없고, 손으로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고, 갈굼, 언어폭력도 폭력이다. 존엄성이 파괴된 군대는 군대가 아니라 양아치 집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도 강원도 화천 모 부대에서 총기 사건으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군에서 억울하게 죽은 젊은 원혼들의 한을 달래는 굿판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다.


무늬만 글로벌 캠퍼스? (유혜진)

유혜진/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학기,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중앙도서관에서 전철역까지 운행하는 학교 셔틀버스를 탔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지 5분 남짓.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곳이 한국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귀를 의심했다. 이어폰 사이로 오고가는 수많은 중국어의 행방이 궁금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버스 뒤편을 바라봤다. 버스 한 쪽에는 10여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중국의 대학교인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옆에 앉아 있던 히잡을 두른 여학생이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간 나는 2년 전 지도 교수님과 함께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준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후배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3일만 시간을 내달라는 교수님의 부탁에 나는 흔쾌히 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오리엔테이션은 교수님이 사적인 시간과 비용을 들여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해마다 대학 당국이 뽑는 외국인 유학생의 수는 급증하지만,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교수님이 직접 팔을 걷어 부치신 것이었다. 한류의 바람을 타고, 지인을 따라 혹은 자국에서 입시에 실패한 외국인 유학생이 대학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여느 유학생처럼 서툰 외국어(한국어) 실력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한국 문화와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빠르게 3일이 지나갔다. 그 이후로 2년 동안 통 연락이 없던 이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동안의 한국 생활이 어땠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나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쉴 새 없이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언어 장벽이나 문화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은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초라며 한 발짝 물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대학 당국과 한국 학생에 대한 비판은 그칠 줄 몰랐다. 해외에 지사까지 두고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할 때 대우와 한국에서의 현실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서울의 Y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는 중국인 장OO씨(25)는 "각 대학별로 유학생 지원 담당자가 있긴 하지만 증가하는 유학생의 수에 비해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강의 수강이나 언어, 학교생활 등에 대한 사후 관리가 부족하다" 고 털어놓으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유학생에게 친절한 교수님도 있지만, 외국인 학생을 한국 학생과 함께 수업에 참여하는 동등한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정OO씨(23,여)는 "일부 유학생이 대리출석을 하거나 학기 내내 결석을 하고 시험만 보는 경우도 있어 우려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2010년 Y대를 졸업하고 취업한 중국인 루OO씨(26)는 "미국이나 일본 등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엄격한 외국어(영어나 일본어) 실력이 요구되지만 일부 지방 사립대를 중심으로 한국의 대학 입학에 있어서는 그 기준이 낮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때문에 유학생들 사이에서 한국 대학 입학 기준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는 후문을 들려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유학생들은 자신들에 대한 한국 학생들의 이중적인 시각에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백인 유학생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비롯되는 인종차별적 대우는 대부분의 학생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바였다. 대다수 한국 학생이 자신의 학교가 외국인 학생이 많은 '글로벌' 캠퍼스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강의실에서는 유학생을 외면하기 십상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특히 학점 경쟁이 심한 오늘날, 함께 팀 프로젝트를 진행해야하는 경우라면 함께 과제를 풀어나가는 기쁨을 얻기보다 다른 팀원에게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실제로 서울의 S 사립대를 다니는 한국인 유란희(23,여)씨는 "중국어나 일본어 강의가 개설되면 한국 학생의 상당수가 자신들의 강의 선택권이 줄어들었다는 피해의식을 느낀다"는 경험담도 털어놨다. 일부 동아리나 언어교환 프로그램, 몇몇 이벤트성 행사가 아니라면 대다수 유학생들이 한국 학생과 어울리기는 사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외국인 유학생의 수가 급증하고 있지만 캠퍼스 내에는 그 어떤 제도적, 인식적 차원의
개선도 일어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이처럼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캠퍼스 내 외국인 유학생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학과 단위의 자치 모임이나 동아리 모임에서 어눌한 말투를 가진 외국인 유학생의 자기소개를 듣는 일은 이제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강의실에서도 팀별 과제를 위해 팀을 짜다보면 외국인 학생 한두 명쯤은 함께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교육과학기술부의 통계에 따르면 2000년 3700여 명에 불과했던 외국인 유학생의 수는 2003년 1만 명을 넘어서더니 2010년에는 8만 3000여명으로 빠르게 늘었다. 전체 대학생 중 0.1%에 불과하던 외국인 유학생 비율은 이제 2.3%까지 증가하게 된 것이다. 양적인 캠퍼스 글로벌화는 빠르게 이뤄지고 있지만, 그 내실은 어떠한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차적인 성찰은 외국인 유학생의 학생 수를 늘리는 데만 급급한 대학 당국에게 필요하다. 대학 당국이 내세우는 명분은 대학의 '글로벌화'다. 세계화 시대에 맞춰 많은 외국인 학생을 유치해 한국 학생과 유학생 모두의 학업과 연구에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유학생 수만을 늘려 각종 대학 평가의 국제화 지수에서 높은 점수를 얻겠다는 의도가 가장 크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일부 지방 사립대는 부족한 대학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정원 외 선발이 가능한 외국인 유학생을 무분별하게 선발해왔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를 방관한 채 쉽게 입학 승인을 해주었다. 유학생의 양적 증가에만 몰두한 나머지 학생 관리 서비스가 부실함은 물론 한국 학생들의 인식 개선도 이뤄지지 못해 사회적 문제로까지 빚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얼마 전 외국인 유학생의 중도탈락이나 불법취업이나 불법체류 등이 사회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세계화' '다문화'가 오늘날 우리사회의 화두다. 대학도 앞장서서 이 트렌드에 맞추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수적인 증가와는 반대로 질적인 차원의 '글로벌화'에 대한 의문을 감출 수가 없다. 적절한 제도와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수가 소수를 배려하는 자세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면 이는 사실상의 '폭력'과도 같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오는 길, 이슬람 문화권에서 온 한 친구가 자신은 언제쯤 교내에서 마음 놓고 밥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혁명과 촛불: 아주 짧은 인권의 세계사(육영수 위원)

육영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프랑스혁명이 연상시키는 공포의 상징물인 기요틴은 사실 평등하고도 인도주의적인 죽음을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혁명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에서는 출생과 사회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형식의 사법적인 죽음이 선고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목을 베는 참수형은 귀족에게만 허용된 특권적 죽음이었고, 제3신분으로 분류되었던 평민 범죄자들은 목을 매는 교수형으로, 이단이나 마법과 수간(獸姦) 같은 도덕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몸을 형틀에 묶은 뒤 뼈를 체계적으로 부러뜨려 목숨을 빼앗았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가장 야만적인 능지처참 형벌은 왕에 대한 반역죄를 감히 도모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프랑스혁명 덕분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과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죄인들은 공평하게 고통 없는 찰나적인 참수형을 맞이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끔직한 ‘죽음의 평등’ 외에도 프랑스혁명은 근대적인 인권개념의 탄생지라는 평가에 걸맞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개혁을 실천했다. 고문과 노예제와 같은 비인간적인 제도가 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와 유대인 및 사형집행인과 같은 직업적·인종적·종교적 소수자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인간의 여러 권리들에 대한 무지, 망각(소홀), 또는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낳은 유일한 원인”이라고 천명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1789년)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인권의 중요성을 계몽하는 좌표가 되었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안전과 압제에 대한 저항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이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들의 하나”라는 조항들은 근대 인권이 지향·성취해야 할 기본목표를 명시했다. 

 유감스럽게도, 근대적 인권의 탄생이 인간성의 자동적인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역사는 일직선으로 행진하지 못하고 때로는 소용돌이에 휘감기며 때로는 위험한 여울목에서 실종되거나 익사한다. 예를 들면, 1792년의 자유로운 이혼법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가부장권의 손아귀에서 옥죄였다가 왕정복고와 함께 1816년에 취소되었다. 아이티혁명의 흑인영웅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로 잡혀와 외딴 감옥에서 1804년 사망했고, 1830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이슬람교도) 남성들은 뒤늦은 1947년에야 공민권을 획득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가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인권의 청사진을 제공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계급―인종의 편견과 차별에서 유래하는 인권의 억압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되씹어보면, 남녀평등, 성소수자의 권리, 노동과 복지의 권리, 휴식과 사생활의 권리, 이주외국인의 국적획득과 귀화의 권리 등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혁명적 과제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민족/제국주의 시대라고 알려진 19세기 후반부에서 냉전시대로 특징되는 20세기는 역설적으로 인권의 중세(암흑)시대였다. 민족‘자결’주의라는 배타적인 신념은 다른 언어적·종교적·인종적 소수민족들을 증오하도록 선동하는 나팔소리로 전락했고, 좌파/우파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무한경쟁의 수레바퀴 밑에서 인권은 산산이 조각나고 깜깜하게 감금당했다. 1944년에 영국과 소련은 곧 출범할 유엔헌장에 인권 항목을 포함시키자는 다른 나라들의 제안에 반대했고, 미국은 모든 인종의 평등에 관한 구절을 포함시키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바야흐로 인권은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통제하고 배급해야 할 권력으로 변질했으며, 동시에 특정 이데올로기적 올바름을 후원하고 확장시키는 무기로 작용했다. 이런 세계사적 위기 속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의 기본정신을 계승·발전시킨 〈세계인권선언문〉이 1948년 유엔의 주도하에 발표되었다.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150년 후에야 인권은 비로소 재 정렬된 기준선에 서서 힘찬 달음박질의 호각소리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 인권선언문
사진 출처 - 네이버

 우연히(?) 〈세계인권선언문〉이 공표된 1948년에 독립국가로 출범한 우리나라가 지난 반세기 동안 경험한 인권의 역사는 어떤 무늬와 빛깔일까? 제1공화국 이승만 독재시절→박정희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서의 인권은 어떻게 부침하고 왜 후퇴했는가? 독재자를 하와이로 내쫓았던 4·19 학생혁명의 값진 희생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촛불축제로 부활하는가? 공기관의 민간인 불법사찰, 쥐(G)20정상회담 포스터 농담사건, 창공의 크레인에 위태롭게 고립된 노동권 등 시대착오적인 인권침해의 ‘배후’에는 누가 비겁하게 숨어 있는가?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심각하게 성찰하는 시간이야말로 이 땅에서 ‘인권적 인간형’이 단련되고 숙성되는 위대한 순간이다. 강조하건대, 누구의 이름을 ‘대한민국 인권탄압 실명사전’에 기록해야 하는지 우리는 (장마더위보다 더 짜증스러울 정도로) 물어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좋은 질문은 틀린 대답을 늘 이기기 때문이다.

육영수 위원은 현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 -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이스라엘은 적입니다. 그들은 내 고향인 레바논, 그리고 요르단 시리아 팔레스타인 땅을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이웃이 아닙니다.”

와엘 사브 회장은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다. 레바논이 고향이지만 아랍에미리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그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반응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오랫동안 체득한 처세술인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 문제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웃나라인 레바논 사람으로서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란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난 5월22일부터 28일까지 8일 동안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를 방문했다. 6주에 걸친 순회특파원 일정 중 첫 단추를 중동으로 꿴 셈이다.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격변과 침묵, 경제적 번영과 답보를 대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기 위해 만나는 중동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이스라엘과 관련한 많은 질문을 던져보려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만나본 ‘중동’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이웃나라를 힘으로 위압하고 영토를 불법점령하고 수백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그런 깡패 짓을 대놓고 하는데도 말리는 건 고사하고 편만 들어주는 미국에 대한 불만이 두 번째였다. 그것은 마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모든 학생들이 미워하지만 ‘완력’에 밀려, 그리고 학교가 채워준 ‘완장’에 눌려 불만을 삭일 수밖에 없는 학교 규율부장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사업가로 일하는 한 이라크인 알리 가잘은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이건 누구건 우리처럼 사업하는 사람에겐 아무 상관없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미국은 십년 넘게 사담과 친구로 잘 지냈고, 그 뒤로도 딴 짓 못하게 막아만 놓고는 건드리지 않고 그냥 뒀다. 그러다가 왜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라크를 난리판굿으로 만드는가. 사담이 대통령일 때 나는 이라크에서 기업하는데 아무 문제없었다. 오히려 사담이 무너지고 나니까 극단주의자들이 내 공장을 불질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이민 올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업관계인 다른 이집트인 이햅 옴란의 말은 더 냉정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나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믿지 않는 것처럼 미국도 믿지 않는다. 왜 중동 평화가 안 되는가. 우리는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데 이스라엘이 평화를 원치 않는다.”

두 사람은 종교간 갈등이라는 인식에 대해서도 단호히 손을 저었다. 가잘은 “이라크에 유대인이 많이 산다. 천년 넘게 아무 문제없이 다들 어울려서 평화롭게 살았다. 중동 국가 어디에나 유대인들이 산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은 지금 어떤 처지인가.”고 반문한다.

이집트인 에즈딘 엘하산은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이 미국에게도 손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아랍은 원래 상인문화가 발달해서 미국과 정서상 더 잘 맞는 곳”이라면서 “미국이 이스라엘만 옹호하면서 중동권에 반미 정서가 퍼졌고 결국 많은 중동국가가 소련과 가까워졌다”고 지적했다. 결국 그는 “미국은 이스라엘을 얻는 대신 전체 중동권을 잃었다.”는 것이다.

6주간 순회특파원의 핵심 주제는 ‘공공외교’였다. 공공외교는 한국에선 생소한 개념이지만 간단히 말해 ‘상대방 국민의 마음을 직접 얻는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외교가 외교관 대 외교관, 정부 대 정부라면 공공외교는 주체가 정부일 수도 있고 시민단체일 수도 있다. 대신 대상은 상대국 정부가 아니라 상대국 국민의 ‘이해와 공감’인 셈이다. 문화외교, 학술교류는 물론 개발원조단체들의 활동도 공공외교에 포함된다.

한국 같은 나라에게 공공외교가 필요한 건 무엇보다도 4대 강대국에 둘러싸이고 분단된 상황에선 힘으로 밀어붙이는 외교는 물론이고 한류 자랑만 하거나, ‘자랑스러운 1만년 역사’같은 허황된 국수주의 경쟁을 벌이거나, 다른 이웃은 나몰라라 하고 특정 이웃만 ‘편애’하는 행태 모두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란 문제의식 때문이다. 가령 ‘한미동맹’을 되살린다며 남의 나라 대통령 골프차량 운전이나 해주고 쇠고기 받아오는 방식은 접어두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상대국 국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어내는 걸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나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각인시킬 것인가, 이는 우리는 어떤 나라를 알릴 것인가란 주제로 직결된다. 고민은 근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란 토론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얻어냈다. 이스라엘계 로비단체인 AIPAC는 미국 내에서도 최대 최고 로비단체다. 아무도 이 단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중동인들의 ‘불신’을 보면서, 그리고 이집트 다음으로 찾아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한 각국 문화축제에서 팔레스타인 부스 앞에서 땡볕에 길게 늘어서 있는 헝가리 시민들을 보면서 나는 이스라엘 ‘공공외교’의 빛과 그림자를 본다.


 9월 런던에서 열리는 ‘템즈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YG 가수들의 공연을 촉구하는 영국 팬들의 플래시몹 시위
사진 출처 - YG엔터테인먼트

하긴 멀리 볼 것도 없을 것 같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점령’하고 있다는 한류를 통해 달러 좀 더 많이 벌어보겠다고 해외에서까지 ‘K팝 공연 촉구 플래시몹’이란 신종 관제데모까지 만들어내고 한류를 무슨 신성장동력이나 되는 듯이 난리치는 정부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한류에 취한 한국의 슬픈 조급증과 물욕을 본다.  

 우리는 한류가 세계 만방을 '점령'해서 그 덕에 이수만 같은 사람이 달러 많이 벌어들이는 나라를 원하는건가? 독도 문제를 이슈해 보려는 일본 의원 세 명에 온 나라가 난리법석을 떨며 군복입은 아저씨들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나라를 원하는가? 동계올림픽 한다고 개발업자들 배불려 주고 이건희 회장 사면에 면죄부를 주는 나라를 원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182억원을 들여 단계적 무상급식을 할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단계적 무상급식을 할 건지 물어보는 걸 주민투표랍시고 하는 나라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 것일까. 그게 해결이 안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외국에 알릴지가 해결이 안된다. 그게 안되면 글로벌만이 살길이니 해외 인재 영입해야 한다며 인도 사람 채용해놓고 고작 한국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며 삼겹살에 소주로 밤샘시키는 짓이나 벌이는 어떤 나라 대기업처럼 되기 십상이다.


돌아다니기 참 힘드네요 (김미영)

김미영/ 객원 칼럼니스트

 나는 약 세 달 전 다리를 다쳤다. 순간 넘어지면서 인대가 늘어난 것이다. 인대가 늘어난 것은 뼈가 부러지는 것보다 더욱 오래 아플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설마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몇 주면 나을 것 같았던 다리는 한 달이 넘고 두 달, 세 달이 넘어도 완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리가 다쳤으면 집에서 가만히 쉬어야 하지만, 참 무던히도 움직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아프면 쉬지 뭐 하러 밖에 나와”라고 말한다. 하지만 매일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는 내게 집에서 가만히 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를 목적지까지 에스코트해 줄 백마 탄 왕자님이나 순간이동 초능력이 없는 한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 

 어쨌든 일단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다리 한 쪽을 다쳐 걷는 것조차 힘든 나에게 서울 곳곳은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자취집 바로 앞에 있는 학교에 가는 것도 고역이다. 매일 다녔던 길이지만 아침마다 차가 많이 지나가는 줄 몰랐다. 길을 가다 내 주위로 차가 오면 잠시 긴장한다. 예전 같으면 차를 피해 길 가장자리로 빨리 움직일 수 있었지만, 절뚝거리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는 차를 제 때 피할 수가 없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너무 일찍 빨간 불로 바뀐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횡단보도를 건넜을 때 나는 반도 건너지 못하다가, 내 바로 앞에서 우회전하는 차에 깜짝 놀란 적도 많다. 

 특히 내가 다니는 학교는 경사가 심하다. 2년 전부터 학교 초입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지만, 등교하는 것은 여전히 괴롭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왔어도 수많은 계단과 비탈을 지나야 한다. 더욱이 요새는 캠퍼스 내에 공사장이 많아졌다. 공사장 때문에 길이 막혀 우회해야 하거나, 좁고 안전하지 못한 길을 택해야 한다. 평소에 학교 다닐 때에는 그저 작은 불편함이었지만, 다리를 다친 나에겐 불편함을 넘어선 공포였다. 

 지하철을 타는 것은 더욱 문제였다. 지하철은 버스처럼 오르막, 내리막길을 지나거나 커브를 돌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편안하다. 하지만 너무 계단이 많다. 물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있지만 그 수가 너무 적고 찾기도 힘들다. 하차한 후 엘리베이터가 내가 내린 승강장에서 불과 20m 안에 있는 경우는 행운 중의 행운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50m, 70m, 심지어 100m 이상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출구로 나가기 위한 엘리베이터도 턱없이 부족하다. 승강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개찰구를 나오면, 또 다른 엘리베이터를 찾아야 한다. 나같이 다리가 아픈 사람들에게는 약 올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찾아도 문제다. 예를 들어, 5번 출구로 가기 원했으나 엘리베이터가 10번 출구 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서 다시 원하는 출구까지 걸어가든지, 아니면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스컬레이터를 더 선호하게 된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 에스컬레이터의 시동이 꺼져 있는 경우도 많다. 물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계단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다. 많은 곳에서 에스컬레이터의 한 쪽만 시동을 꺼놓는 경우 내려가는 쪽을 꺼놓는다. 사람이 많은 환승구간의 계단 역시 공포의 대상이다. 난간을 잡지 않으면 위태롭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사람들에게 밀리고 치이기 전에 계단 가장자리로 빨리 이동해야 안전하다.  


교통약자들의 이동을 위해 저상버스, 지하철 계단에 휠체어 리프트 등의 제도들이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어려움도 막상 내 일로 닥쳐야 안다고 했던가. 다리를 다치고 나서야 매일 다녔던 길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길인지 알았다. 횡단보도의 너비와 신호등 시간, 엘리베이터의 수, 에스컬레이터의 속도 등등 이전에는 관심조차 없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직접 불편을 경험하지 않는 한 몰랐을 것들이다. 이전에는 ‘저상버스’의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 했다. 계단 높이만 낮을 뿐 다른 버스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불편을 겪고 나서야 저상버스가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었다. 

 ‘교통약자’라는 말이 있다. 고령자, 장애인, 어린이 등 생활하면서 이동하는데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교통약자는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4분의 1이라고 한다. 교통약자들에게는 이동하는 장소마다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저상버스가 확충되고 지하철 계단에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하는 등 많은 제도들이 도입이 되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 진정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는 지난 4월부터 ‘2011년도 교통안전 종합대책’을 수립해 순차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현재 1385개인 어린이보호구역을 1505개로 확대, 노인보호구역 13개소를 지정, 보행교통 불편지점에 대한 횡단보도 총 20개소를 개선하는 등 교통약자 우선의 도로환경을 조성해 나갈 계획이라 한다. 이런 대책이 교통약자들의 입장에서 서서 올바로 시행이 되길 바란다. 

 인대가 늘어나서 나는 석 달이라는 시간 동안 불편을 겪고 있다. 발목보호대 정도만 하고 다니는 것도 이렇고 불편한데 그동안 장애인과 노인, 임산부들은 얼마나 큰 불편을 겪고 있었을지 새삼 느낀다. 조심스럽게 느릿느릿 걷다 보면 하루에 몇 번씩은 사람들에게 툭툭 치인다. 계단 하나하나, 작은 비탈 하나하나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다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이런 불편을 감수하기엔 너무 가혹하다. 불편하고 위험하면 나오지 말라는 말은 더더욱 가혹하다. 교통약자는 누구나, 언제든, 어디에서든 될 수 있다. 교통약자에게 편안하고 안전한 길이라면 모든 이들에게 편안하고 안전한 길이다. 

 우리나라에는 지난 2005년 제정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이 있다. 이 법의 제3조는 ‘이동권’에 대해서 말한다. “장애인 등 교통약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결국 경험하고서야 알았다.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이동하는 것도 우리가 가진 중요한 권리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 이야기 - 이상재/ 대전시민아카데미 운영위원

이상재/ 대전시민아카데미 운영위원

 단군 이래 최대 국운상승의 기회라고 떠들어 대던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마침내 열리던 그 해, 올림픽을 위해 몇 년간 아침 길거리 청소도 하고, 버스 탈 때 줄도 섰지만 올림픽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치러지지 않았고 아마 한 명의 외국인 관광객도 들리지 않았을 작은 도시의 고등학교에 나는 입학했다.

 작은 도시라고는 하지만 지역에서 하나밖에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약간의 자부심과 입학식 날부터 밤 11시까지 진행되는 야간자율학습의 고통이 그 시절 내 기억조각들의 대부분이었다.

 그때 내가 중학생과는 다른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은 실제 소총 무게와 비슷한 플라스틱 모형 총을 들고, 허리에는 수통까지 차며, 군복을 입은 선생님에게 제식훈련을 받았던 ‘교련’과목의 등장이었다.

 학년 간 위계질서가 군인들의 계급 간 차이처럼 아주 엄격했던 당시의 고등학교 분위기와 학생들을 예비 군인처럼 취급했던 교련과목은 묘하게 어울렸던 것 같다.


1970년대 "목총 들고 분열"
1944~2008년재까지 교육활동 홍보사진과 추억의 교육관련 사진전 입선작 전시회 가운데
1974년 태백 기계공고학생들이 교련시간에 목총을 들고 분열을 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교련시간도 입시위주의 학교정책 때문에 다른 예체능계 과목과 같이 자율학습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일 년 중에 단 하루 ‘교련’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각인되는 날이 있었는데 그것은 학교의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다는 ‘교련검열’이었다.

 교련검열은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토요일 오후 1학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2학년 학생회간부와 교련간부들이 실시하는 일종의 생활지도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단순한 생활지도에서만 끝나지 않고 선배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동반되었기 때문에 1학년 학생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런 시간중의 하나였다.

 바로 옆 반의 매 맞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앉아서 조를 이뤄 끊임없이 들어오는 선배를 맞이하는 1학년들의 심정은 공포 그 자체였다.

 선배들은 머리길이와 옷차림에서부터 교실 청소상태, 심지어 개인의 소지품까지 검사 했고 규정에 벗어난 학생이 있으면 어김없이 뒤로 불려나가 걸레자루로 매타작을 당했다. 그나마 교칙을 위반했다던가 해서 맞으면 좀 나은 경우였고, 이유 없이 불려나가 매를 맞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나 같은 경우는 키가 크다고 다른 큰 친구들과 함께 불려나가 맞았다. 어떤 경우는 아예 반 전체가 대답소리가 작다고 단체로 맞기도 했다.

 ‘검열’을 빙자한 선배들의 공식적인 폭력행사는 교사들의 묵인아래 이루어졌다. 내가 2학년 때 어떤 교사는 수업시간에 웃으면서 “이번 교련검열은 좀 살살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한 선배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은 오래된 전통이라는 명목아래 학교 구성원들 중 누구하나 문제제기가 없었다. 폭력행위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1학년들조차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분위기 속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나갈 정도였다.

 그러한 교련검열은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이번에도 중간고사를 치룬 어느 토요일, 학생회 간부를 포함한 수 십 명의 2학년들은 자율학습 중인 같은 반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환호를 받으며 긴 걸레자루를 들고 1학년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1학년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는 아련한 추억의 노랫소리와 같이 2학년들을 미소 짓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월요일 학교에 갔을 때 담임은 싸늘한 시선과 함께 다짜고짜 지난 토요일 교련검열 갔었던 학생들을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난 교련검열 때 걸레자루에 맞은 1학년 학생 중 몇 명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공식적인(?) 묵인으로 일관했던 교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학생들을 다그쳤고 결국 몇몇 가해자 학생들은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수 십 년을 내려왔다는 전통의 교련검열은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그 때 교련검열을 하지 못했던 2학년들은 안도했을까? 아쉬워했을까? 아니면 분개했을까?)

 고작 1년의 차이지만 너무나 엄격한 선후배간의 위계질서, 그래서 선배들의 명령이라면 잘못되고 비상식적이어도 전통이란 명분아래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분위기, 자기가 선배가 되어서는 불과 1년 전 자신들의 모습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완벽하게 악습의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며 방치하다가 정작 사고가 터지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관리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그래서 귀신도 잡는다는 어느 부대의 총기사고 전후사정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난 아주 오래전 나의 경험담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