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법 개정안, 한나라당 직권상정 카드 만지작?
“한나라 60여명 본회의 행 도장 찍어놔”…“시간제한 자체가 위헌”
2010년 06월 28일 (월) 12:46:03 권순택 기자 nanan@mediaus.co.kr

야간 옥외집회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한나라당의 집시법 개정안을 두고 여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7일 한나라당은 오후11시부터 오전 6시까지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 개정안이 야당 및 시민사회의 반대에 부딪치자 자정부터 오전 5시까지 금지하는 수정안으로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시간제한’을 두는 것 자체가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위배된다며 수용불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야당 반발에 한나라당은 행안위 부결에 이은 본회의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들고 있어 충돌 일보직전의 상황이다.

   
  ▲ 28일 오전10시 30분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인권 및 시민사회단체들이 "한나라당의 개정안은 집시법 10조 헌법불합치 조항을 아예 ‘위헌 조항’으로 바꾸자는 안"이라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권순택  

이와 관련해 인권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28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집시법 10조 헌법불합치 조항을 아예 ‘위헌 조항’으로 바꾸자는 안”이라며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약칭 민변) 박주민 변호사는 “한나라당이 집시법 개악과 관련해 친이계의 세종시 표결처리 방법과 동일하게 행안위에서 부결시키시고 바로 본회의에 직권상정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며 “민주당이 협상에 응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벌써 60명 의원들이 도장을 찍어 놓은 상항”이라고 밝혔다.

또한 “한나라당은 자정 12시부터 5시까지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도록 하고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거주자와 관리자 등의 동의를 받아 집회가 가능하다는 규정을 추가했다”며 “그러나 이는 현재 집시법 9조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집시법 8조는 경찰이 집회 및 시위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도록 했으며 9조는 경찰의 금지통보에 대해 집회 주최자가 이의를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박주민 변호사는 이어 “헌재 5명의 재판관은 야간옥외집회에 대한 원천 금지와 예외적으로 경찰의 허가를 둔 집시법 10조에 대해 위헌을 낸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다시 시간제한을 두고 예외적으로 경찰의 허가까지 두도록 한 것은 헌재 판결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역시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허가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집시법 10조가 위헌이라는 것인데 그 예외마저도 원천금지한 한나라당 안이 어떻게 위헌이 아닐 수 있냐”고 지적했다. 또 권오헌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역시 “헌재에서 다시 위헌이라고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 집시법 개악안”이라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은 공권력의 폭력이나 견제하라”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국진보연대 이강실 상임대표는 “한나라당은 그동안 집시법 개정에 있어 오후10시에서 오전6시, 그보다 한 시간 더 허용한 오후 11시부터 오전6시로 수정하더니 이제는 자정12시부터 오전 5시까지 금지토록한 안을 제시하고 있다”며 “이를 두고 한나라당은 양보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들 모두 똑같은 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은 집회를 허가제로 할 수 없다고 했으나 한나라당의 안은 시간제한을 두고 완전히 허가제로 운영하겠다는 뜻”이라며 “집시법 10조를 완전 삭제해버려야지 개정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는 “집시법을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고 집회에 대해 경찰이 관할하는 나라도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사전에 집회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전투경찰을 동원해 진압하는 나라도 전 세계에 우리나라밖에 없다”며 “집시법 10조는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것으로 집회와 시위는 무조건 불온하다는 독재정치의 잔재다. 국민의 인권은 1분 1초도 멈춰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 사회를 본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 역시 “한나라당은 야간에 집회가 폭력적으로 변한다며 그 근거로 2008년 촛불집회를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나 당시 진짜로 놀란 것은 평화로웠던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경찰들의 모습”이라며 “한나라당은 기본권인 집시법 개악 말고 공권력의 폭력이나 견제하라”고 비판했다. 이어 “국민들은 평화롭게 집회를 할 수 있는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은 28일 단독으로 오전 11시 30분경 행안위 전체회의를 열고 집시법 개정안 처리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오후 5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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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50점·절도 20점…검거실적 압박이 가혹수사 불러
범죄별로 점수…단순범→강력범 만들 우려
아동 성추행 등은 점수 낮아 소홀 대처도
시민단체 “고문수사, 인권경시 풍조도 한몫”
한겨레 길윤형 기자기자블로그 송채경화 기자 메일보내기 신소영 기자기자블로그
» 경찰 지휘부의 무리한 실적주의를 비판하며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의 사퇴를 촉구한 채수창 서울 강북경찰서장이 28일 오후 강북구 번동 강북경찰서에서 퇴근하며 배웅나온 간부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경찰 평가시스템 어떻길래

채수창 서울 강북경찰서장이 ‘양천경찰서 고문·가혹행위 사건’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 과도한 실적 경쟁은 경찰 내부에서도 꾸준히 지적돼 온 문제다. 이명박 정권 들어 경찰이 ‘성과’와 ‘엄격한 법 집행’만을 강조했을 뿐, 이를 ‘인권’과 조화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선 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현직 경찰서장이 경찰 수뇌부에 직격탄을 날리는 상황까지 벌어져 경찰로선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게 됐다.

경찰의 실적평가는 경찰청이 해마다 내놓는 ‘성과평가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각 지방경찰청이 작성한 평가 시스템에 따라 이뤄진다. 지난 1월 취임한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은 취임사에서 “조직 전반에 성과주의를 도입해 근무 분위기를 쇄신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성과주의를 유달리 강조해 왔다.

<한겨레>가 28일 확인한 서울청의 ‘2010년 수사·형사 업무성과 평가계획’을 보면, 시민들을 상대로 한 치안 범죄를 다루는 형사 부서의 경우 범죄별로 구체적인 점수를 정해 놓고 사실상 실적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범죄별 기본 점수는 △살인 50점 △강도살인 70점 △방화·강간 20점 △13살 미만 강제추행 20점 △조직폭력 20점 등이다. 서울청은 이를 근거로 산출된 점수에 따라 산하 31개 경찰서를 가(14개)·나(16개)·다(3개) 등 3등급으로 나눠 관리해왔다. 경찰청 관계자는 “서울청이 ‘다’ 등급을 받은 경찰서 간부들을 상대로 지속적인 감찰조사를 벌이는 등 정도가 좀 지나쳤던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실적주의에 대해서는 내부에서 꾸준한 비판이 이어져왔다. 서울 한 지구대의 경위급 간부는 “과도한 실적주의는 우리가 지켜야 할 국민을 실적의 ‘대상’으로 보게 하는 문제를 낳는다”며 “사소한 잘못을 한 국민은 훈방조처할 수 있는데도 실적을 올려야 하다 보니 국민을 순식간에 ‘거리의 횡포꾼’으로 만드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범죄별로 점수를 정해놓다 보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등 배점이 상대적으로 낮은 범죄에 대해서는 수사 의지가 약해지는 문제도 나타난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조현오 서울청장이 부산청장에서 경기청장으로 옮긴 뒤 한달 만에 터진 ‘김길태 사건’의 경우에도 성범죄에 대한 평가 점수가 낮아 경찰이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반성이 (내부에서)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 서울청의 실적경쟁은 어떤 모습이었나?
이날 채 서장의 기자회견이 끝난 뒤 강희락 경찰청장과 각 지방경찰청장 등은 오후 5시 긴급 화상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이날 회의에서 경찰 수뇌부는 채 서장을 기강문란으로 직위해제하고, 실적평가의 부작용과 운영상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온 국민이 경악하고 있는 양천서 사건 등이 일어났는데도, 정작 경찰 지휘부는 일선 경찰에게 책임을 미루는 등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며 “양천서 사건의 배경에는 경찰 수뇌부의 인권 경시 풍조가 한몫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 서장도 “지방청에 가니까 30여명에게 표창을 주는데 거의 다 검거 실적 표창이고, 누구 하나 인권 보호에 앞장섰다거나 국민에게 친절했다고 포상을 받는 것은 보지 못했다”며 “경찰 문화가 이렇게 곪을 대로 곪았다가 결국 양천서 사건이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길윤형 송채경화 기자 charisma@hani.co.kr


기사등록 : 2010-06-28 오후 07:56:02 기사수정 : 2010-06-28 오후 1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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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당신이 60년 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2010.06.24. 제816호]
하어영
[특집] <한겨레21>이 단독 입수한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요시찰인카드’…
경찰이 90년대까지 ‘업데이트’, 아직도 관리하며 공무원 선발 등에 자료로 활용
» 1950년 7월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당시에 여기서만 4천여 명이 희생됐다. 이렇게 한국전쟁 기간에 부역자 학살은 전국에서 벌어졌다. 한겨레 자료

전쟁이 일어났다. 한 남자는 숙부의 말을 따라 노동당원으로 가입했다. 참호를 파고, 담배 심부름 따위를 했다. 그 죄값으로 1년이 넘게 옥고를 치렀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자, 부역자라는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40년, 그 남자가 세상을 뜰 때까지도 그 낙인은 여전히 남았다. 자녀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고향에 남은 이웃들은 60년 전의 이야기를 더이상 하지 않는다.

<한겨레21>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도운 부역자와 보도연맹원 등을 종전 뒤 공안기관에서 감시하기 위해 작성·관리해온 ‘요시찰인카드’를 단독 입수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요시찰인카드는 감시 대상자의 세세한 일상을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까지 철저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이념 갈등 속에서 한 개인의 선택이 낳은 불행과, 그 개인을 끝까지 감시망에 가둬둔 국가의 집요한 보복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구나 이 자료들은 ‘공안조회’를 통해 남아있는 가족의 삶에까지 두터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한겨레21>이 한 지방의 경찰서에서 입수한 요시찰인카드는 총 5권이다. 요시찰 대상자 1명당 1권씩으로 묶여있다. 각권은 관찰보호자 카드, 감시망 체계도, 요시찰인 자택 약도, 요시찰인 가옥 구조도, 재판 기록, 보안처분 대상자 신고서, 주민등록등본, 공안사범 조회 리스트, 신원조회 신청 기록 등으로 구성된다.


부부 다툼까지 기록한 요시찰인카드

우선 관찰보호자 카드는 요시찰 대상자의 본적과 주소, 가족관계에서부터 키, 머리 모양, 눈썹, 코, 치아, 언어(표준어 구사 여부) 등에 이르는 신체 묘사와 재산 관계 등을 적시하고 있다. 요시찰인카드의 핵심 내용은 관찰보호자 카드에 붙어있는 ‘시찰 내용’이다. 이는 대상자가 사망할 때까지 월 1회에서 3회 정도(많게는 10여 회까지) 경찰이 그의 동향을 사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상자 시찰 요령’도 자세히 규정돼 있는데, △용공 불순분자 접촉 여부 △빈번한 여행과 장기 출타 및 그 이유 △불분명한 가족의 증가 및 왕래와 그 확인 결과 △급격한 재산 증가와 생활수준 향상 및 동 자금의 출처 △전적, 개명 등 인적 사항 변동과 그 이유 △각종 범법행위 및 기타 특이사항 △현 국가 시책에 대한 참여도 등이 주 내용이다. 사찰 내용에는 공안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벼농사의 파종 상황이나 부부 다툼 등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세세히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개인별 차이는 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게 손글씨로 일일이 ‘업데이트’됐다. 또 시찰담당자인 경찰이 지역감시자와 인접감시자, 망원감시자 등을 둬서 이중·삼중으로 감시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는 감시망 체계도라는 문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요시찰 대상자가 경찰서 관할 지역 밖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 담당 경찰관부터 감시자까지 전부 일괄 조정됐고, 이 내용도 요시찰인카드에 업데이트됐다.

흥미로운 것은 감시 대상자의 주거지 약도와 자택의 가옥 구조도다. 약도에는 관할 경찰서(또는 지서)를 기준으로 도보 및 차량으로 걸리는 거리와 시간이 기록됐다. 또 가옥 구조도에는 “대문이 없고 앞쪽 돌담이 헐어지고 삼면이 나무 울타리로 하시든지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함” 등 담장에 대한 묘사와 출입 가능 여부가 적혀 있다. 해당 경찰서 관계자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도주로를 미리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정환경조사서를 덧붙여 성격이나 주변평, 사상, 가정생활, 교육 정도, 교우 관계, 재산 관계 등 관찰보호자카드에 기록된 것보다 좀더 자세한 개인 신상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한국전쟁 당시 한 개인이 북에 협조한 이후의 삶 전부를 감시해 기록한 것이다.

지난 6월16일 요시찰 대상자 가운데 한 명인 ㄱ씨를 찾아나섰다. 요시찰인카드에 나온 그대로 찾아가보기로 한 것이다. ‘지서에서 남쪽으로 1.7km 첫 동리.’ ㄱ씨 요시찰인카드에 기록된 약도는 여전히 정확했다. 카드 안에 있는 평면도처럼 삼면이 나무 울타리였으며 앞쪽으로는 돌담이 1m 이하로 둘러쳐져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 지난 일을 왜 갑자기 물어요?”

여든을 넘긴 노구가 된 ㄱ씨 부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연방 반복했다. 그 말에는 경계심이 잔뜩 묻어났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어요. 무슨 일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고생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똑똑한 사람도 아닌데, 왜 그 사람이 빨갱이였겠어요.”

60년 전,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ㄱ씨의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국전쟁이 난 지 두 달 뒤인 그해 8월이었다. “숙부가 와서 집안 심부름을 하라는데 못하겠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심부름을 다닌 거예요. 동네에서 걷은 돈도 가져다드리고, 담배 심부름도 하고. 그게 다예요.”

» 한국전쟁 당시 대구 인근에서 벌어졌던 집단학살 현장을 2005년에야 발굴했고 여기서 유골이 쏟아져나왔다(왼쪽·한겨레 김태형 기자). 아직도 폐기되지 않은 요시찰인카드 기록들.

법이 사찰한, 법을 모르는 사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요즘처럼 수상한 시절에 서울 올라간 자식들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며 “나는 더는 모른다”는 말로 인터뷰를 사양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ㄱ씨 주변인들의 말과는 달리 요시찰인카드에 드러난 ㄱ씨는 수십 년 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던 공안사범, 빨갱이였다. “1950년 8월 괴뢰군 전투용 참호를 구축하고 괴뢰군 비행기 헌납금 3000원을 제공했음. 숙부인 ㄱ씨에게 양말 등 수종의 물품을 제공하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2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1953년 6월6일 출소한 자.” 기록에는 이런 묘사도 있다. “인근 주민의 세평이 양호한 편임. 사상은 현 정부 시책에 순응하나 기회주의 사상을 포지함. 성질은 음험하고 내성적임.”

ㄱ씨에 대한 경찰의 감시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이었다. “76년 5월×일. △△시장에 농기구를 구입차 다녀온 사실이 있음” “76년 5월×일 본인의 생일로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당일 ㅇ씨(장모)가 다녀감” 등을 망원의 전언이나 경찰의 직접 관찰로 상세하게 기록했다. 경찰이 동네 주민을 망원으로 동원하면서까지 감시한 ㄱ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법 없이도 살 사람’과 ‘성질이 음험한 기회주의자’의 간극은 어떻게 메워질 수 있을까?

동네 사정에 밝다는 ㄷ씨의 집을 찾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이 마을에서 살아온 토박이로 최근까지 동네 이장을 지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ㄷ씨는 대뜸 “죽음을 면한 것만 해도 감사해하는 분위기였다”며 “이 동네에서만 수복 뒤 9명이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즉결 처분됐다”고 말했다.

“8월에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오자마자 지서 앞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은 선전부장, 당신은 여성부장, 당신은 연락부장’ 이렇게 호명했죠. 그때 누가 ‘저 못하겠어요’라고 나설 수 있었겠어요. 그때 ㄱ씨도 연락병인가를 했을 거예요. 그때 부장 한 사람 중에 열심히 한 이들은 다 죽고, ㄱ씨도 지서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와서 똥물 먹고 살아났죠. ㄱ씨랑 같이 잡혀간 사람은 매질로 인해 저 세상에 갔고요.”

ㄱ씨가 숙부를 도왔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처벌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되물었다. ㄷ씨는 그 숙부라는 사람의 이름과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빨치산 출신으로 당시 면 단위의 노동당 간부를 맡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ㄱ씨가 경찰의 기록대로 자신의 성향을 감추고 살아온 사람인지를 물었다. ㄷ씨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라니까…,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래도.”

그런 사람을 왜 경찰이 수십 년 동안 감시했을까?

“팔푼이였다니까!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다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던 ㄱ씨는 실은 ‘법을 모르는’ 정신지체인이었다.

벌써 30년 전에 폐기됐어야

비인간적인 감시의 사슬은 더 이상 ㄱ씨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는 22년 전인 1988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요시찰인카드는 계속 남아 그의 가족을 옥죄고 있다.

ㄱ씨는 숨지기 전인 1979년 이미 보안관찰 면제처분을 받은 사람이다. 요시찰인카드가 작성된 나머지 4명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요시찰인카드는 이미 1980년 관찰보호자 일제 정비계획에 따라 삭제됐어야 하는 자료다. 이들의 요시찰인카드에는 실제로 ‘삭제’라고 표기돼 있다. 그럼에도 폐기나 봉인 등 다른 절차 없이 여전히 해당 경찰서가 이 자료들을 전산과 서류로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요시찰 대상자인 ㅎ씨의 경우에는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뒤에도 여전히 사찰이 계속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ㄱ씨의 가족, 특히 직계가족은 한국전쟁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점 때문에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을지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 관계자는 “한국전쟁 관련 공안기록은 폐기되지 않고 전국 각 지역 경찰서에 남아 있을 것”이라며 “지역의 경찰서에서는 당사자가 있는 한 계속 기록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기록은 ‘요시찰인카드’ 또는 ‘부역자 카드’로 불린다”며 “이후 발생한 공안사범 관리와 함께 진행한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가 밝힌 요시찰인에 대한 관리 실태는 다음과 같다. 요시찰인카드가 남아 있다면 우선 손으로 문서를 직접 작성해 업데이트를 한다. 부역자와 관련된 이사, 사망 등 변동 사항이 있으면 수시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다음 전산 작업을 거친다. 전산화를 통해 해당 경찰서의 과학수사팀이 전담해 관리한다. 이는 수사나 신원 조회 때 조회가 가능하다. 다만 이 조회는 우리가 흔히 아는 ‘범죄경력 조회’(이른바 전과 조회)와는 별도의 절차다. 한국전쟁 부역자에 관한 내용은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과 함께 ‘공안 조회’라는 절차를 거친다. 공안 조회에서는 직계가족도 관련자로 기록돼 보관된다.

아버지의 기록이 자식을 옥죄다

» 충북 청주·청원 지역 보도연맹 처형 현장. 한겨레 자료

공안 조회는 주로 공안 사건을 수사하거나 공무원 및 정부투자기관 직원 등을 선발할 때 참고자료로 쓰인다. 직계가족 중에 부역자가 있다면 당사자가 사망했더라도 기록은 그대로 남아 공안 조회를 통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좌제 폐지가 공언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한국전쟁 부역자들에게는 이런 굴레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법무부는 최근 연좌제 논란이 일었던 ‘공안사범자료관리규정’을 개정해 6월11일자로 시행에 들어갔다. 주요 내용은 “공안사범자료는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게 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이는 촛불집회 참가자를 입건한 경찰이 당사자는 물론 가족의 공안 기록까지 첨부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고, 검찰이 이 자료를 법원에 증거물로 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연좌제 논란을 불러일으킨 뒤 나온 것이다. 당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까지 나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규정의 개정이나 폐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 표명을 했다. 하지만 ‘불이익한 처우를 받게 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새 규정은 그 적용 범위가 모호하고 공안기관간 협조 의무 규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공안사범 관리는 특별히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일선 경찰들의 의견이다.

남아있는 한국전쟁 부역자들에 대한 정보는 폐기돼야 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공안사건 관련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법”이라며 “보관해야 할 법률적 근거가 없는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들은 폐기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는 수사상의 예단을 갖게 하기 쉬울 뿐 아니라 헌법상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오 국장은 “일반적으로 공안기관에서는 법률이 아닌 규칙이나 예규를 보유 근거를 내세우는데, 이는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많은 정보들인 만큼 법률상의 보관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모두 폐기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역사에 대한 기록인 점을 감안하면 우선 경찰 등 공안기관의 자료로는 폐기하되 개인정보를 모두 삭제한 뒤 국가기록원에 기밀자료로 일괄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고스란히 남겨 기억하자는 것이다.

자녀 정보까지 담은 사찰기록

장례식까지 사찰한 집요함

“형식적인 관리였을 겁니다. 다 노인네들이고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 분들이고, 그렇지 않겠어요?” ‘요시찰인카드’에 대해 한 경찰서의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일까? 요시찰인카드를 살펴보면 그의 말은 100% 거짓말이다. 요시찰인에 대한 사찰은 한마디로 ‘집요함’을 특징으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 민청원(??)으로 부역했으며 백미를 주민들에게 거둬 괴뢰군에게 제공해 적을 방조한 자라는 죄목(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산 ㅂ씨의 사례를 보자. ㅂ씨는 월 3회 이상 형사가 직접 탐문하거나 망원(주변 감시자)을 통해 보고됐다. 이 보고는 단순히 ㅂ씨의 상황뿐만 아니라 ㅂ씨 자녀들의 직장명과 거주지까지 담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시찰 당시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거나 “동네에서 돌팔이 의사로 불리고 있다”는 등 당시 정황이나 주변인들에게 떠도는 소문까지 담겼다. 말하자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담은 것이다.

공간에 대한 묘사만 집요한 것이 아니다. 기록은 1975년부터 94년까지 20년에 걸쳐 있다. 보고의 끝은 바로 ㅂ씨의 죽음이다. 특히 1993년에는 “간경화 합병으로 거동이 불편해 바깥출입을 못할 정도”라고 보고돼 있음에도 “형식적인 시찰 지양할 것. 망원 정확한 시찰하에 기재할 것. 보안계장”이라고 ‘파란 펜’으로 기재하기도 했다. ㅂ씨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상자는 주거지에서 계속 간질환 등 병환으로 자가 치료 중이던 자로 병세가 악화돼 94년 0월00일 자가에서 사망하여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기타 불순 동향은 발견치 못함.”

‘중요 동향’이라는 난에는 사망일로부터 한 달 정도 뒤 ‘사망삭제’라고 기록돼 있지만 해당 경찰서에서는 이를 폐기하지 않고 따로 관리했다. ㅂ씨의 카드 마지막에는 공안사범 전산기초자료서가 부착돼 있다. 그의 죄목과 범죄사실을 전산시스템에 입력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족들의 인적사항까지 담겨 있다.

주변인까지 동원한 ‘망원체계’

망원 자신도 몰랐던 망원 노릇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국가권력 혹은 지배 방식은 전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 질서가 반복·재생산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미셸 푸코)

<한겨레21>이 입수한 ‘요시찰인카드’ 자료를 보면, 요시찰인을 사찰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다. 마을 이장부터 이웃, 친구, 친척 등이 주요한 감시자가 됐다. 경찰은 이를 쉽게 줄여 ‘망원’(網員·간첩이나 특무조직 따위의 비밀망에 속해 있는 사람, 북한말)이라고 불렀다. 요시찰 대상자가 이사 등의 이유로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당연히 이 망원 조직은 달라진다. 망원 조직이 달라질 때마다 변화된 망원 조직표 또한 요시찰인카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감시의 주무는 시찰담당자로 통칭하며 순경이나 경장 계급의 경찰관이 맡아왔다. 시찰담당자 아래로 지역감시자 2명(대공조장과 대공요원), 인접감시자 1명, 망원감시자 1명 등이 구성된다. 1명의 요시찰 대상자를 경찰 1명, 민간인 4명 등 총 5명이 감시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자들 또한 본적과 주소를 기입하고 직업과 성명, 생년월일, 성별, 학력과 경력 등 인적사항을 기록한다. 사찰 내용은 출타 상황, 직장 근무태도 등을 공통으로 하며, 가까운 이웃인 경우 가족 상황(인접감시), 매일 일과 점검(망원감시) 등의 임무가 추가됐다. ㄱ씨의 경우 이 감시자들은 모두 마을 사람이며 이장과 이웃 주민 등으로 구성됐다.

요시찰인의 존재 유무나 현재의 감시체계에 대해 경찰은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서도 “현재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ㄱ씨의 요시찰인카드에 등장하는 망원들의 소재를 파악해보니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정작 망원으로 활동했던 이장 ㄷ씨는 자신이 망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ㄷ씨는 “경찰이 무슨 행사 같은 게 있으면 찾아와 ㄱ씨가 잘 지내는지 묻고 가기는 했지만, 정기적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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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경찰고문 수사 ‘늑장+부실’
첫날 관련자 진술만 청취 3일뒤 유치장 화면 복사
5일뒤에야 전체영상 압수 ‘증거조작·은폐방조’ 의혹
한겨레 전진식 기자기자블로그
» 강서·양천시민모임, 강서·양천환경운동연합 등이 모인 ‘양천 정당·시민단체 연석회의’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양천경찰서 앞에서 피의자들에게 수사 도중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책임자의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을 촉구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의 고문·가혹행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검찰이, 지난 4월 초 고문 사실에 대한 진정을 접수하고도 늑장 대응을 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특히 검찰은 피의자의 고문 주장을 듣고도 관련 증거자료를 신속하게 확보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경찰의 증거 조작 및 은폐를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21일 경찰과 검찰의 말을 종합하면, 서울남부지검(지검장 김학의)은 피의자가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진정을 낸 다음날인 지난 4월2일 양천서를 찾아가 유치장 등을 감찰하고 유치인·경찰관 등 관련자들의 진술을 들었다. 검찰은 3일 뒤인 5일에 다시 양천서를 방문해 상황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화면 등을 확인하고 돌아간 뒤 이날 저녁 다시 와서 ‘유치장 녹화 화면’만을 복사해 갔다. 경찰은 당시 검찰에 복사본을 건네며 “다음에는 영장을 가져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검찰은 고문 의혹이 불거진 강력팀 시시티브이 녹화분은 달라고 하지 않았으며, 확보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이틀 뒤인 7일에야 압수수색영장을 가져가 양천서 전체 시시티브이 화면이 담긴 하드디스크 6개를 가져갔다.

그러나 검찰이 이 하드디스크의 내용을 확인해보니, 지난 3월9일부터 4월2일까지 강력팀 사무실이 녹화된 화면은 아예 없었다. 경찰은 “시시티브이 관리업체에서는 기기 오작동 때문에 녹화가 안 됐다고 한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이 역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공교롭게 검찰이 가혹행위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4월2일까지의 화면이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검찰은 4월2일 이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는 사실을 경찰에 알려주고도, 닷새나 지난 7일에야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시시티브이 화면 녹화분을 압수수색한 것이다. 신속성과 비밀성이 생명인 압수수색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 닷새 사이에 양천서는 이를 상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검찰이 결과적으로 경찰에 은폐·조작의 빌미를 준 셈”이라며 “압수수색을 예고한 꼴이 돼버렸다”고 비판했다.

초기 수사 부실 외에 검찰의 늑장 수사도 문제로 지적된다. 4월7일 시시티브이 화면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압수수색한 검찰은 지난 16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사건을 공식 발표할 때까지 두 달 이상 별다른 수사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영렬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는 ‘수사를 미적댄 게 아니냐’는 질문에 “시시티브이 기록이 너무 많아 분석에 시간이 걸렸다”며 “검사와 수사관들이 1500기가바이트(GB)나 되는 시시티브이 기록을 보느라 멀미가 날 정도”라며 수사의 어려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피의자가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날짜가 있기 때문에 선별해서 볼 수 있다”며 “이번과 같은 독직폭행 사건에서 두 달은 상당히 긴 시간”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검찰은 언론 보도가 나간 뒤에야 해당 경찰관을 소환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냈다.

검찰은 피의자의 고문·가혹행위 주장을 눈앞에서 묵살하기까지 했다. 지난달 17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한 피고인이 “경찰이 내 입에 솜을 물리고 얼굴에 스카치테이프를 감은 뒤 폭행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진술하자, 당시 공판검사는 “인권위에 가서 진정하라”며 이를 일축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서울남부지검에 따르면 20일 절도 피의자 등에게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지목된 서울 양천경찰서 강력5팀 직원 5명이 소환돼 15시간 가량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당초 피내사자 신분으로 소환됐으나 조사 도중 피의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검찰은 경찰관 5명에 대한 조사를 가급적 빨리 마무리하고 독직폭행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날 일부 경찰관과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건 피의자의 대질 조사도 실시했다.

검찰 소환에 앞서 자체 조사한 경찰청 감사관실도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감사관실 관계자는 "해당 경찰관들은 ’(피의자들이) 심하게 저항하고 자해를 하려고 해 제압하는 과정에서 물리력을 행사했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가혹행위) 정황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검찰과 경찰은 또 양천서 상황실에 있는 폐쇄회로(CC)TV 녹화기에서 피의자가 고문을 당했다는 시기인 3월9일∼4월2일 사이 전체 30대의 CCTV 가운데 강력 5팀 사무실 CCTV를 비롯한 16대의 CCTV 기록이 저장되지 않은 사실도 확인했다. 경찰이 피의자 인권 보호 등을 위해 설치한 CCTV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이번과 같은 사태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각 경찰서에 따르면 경찰서의 CCTV 운용·관리와 책임에 관한 별도 규정이 없다. 경찰은 지난해 ‘경찰청 CCTV 운용규칙’을 제정하려다가 의견 수렴만 한 채 그만뒀다.

특히 경찰서에서도 강력사건 등 범죄 수사를 집중적으로 맡는 형사계의 CCTV는 저장 용량과 화질 등 기능이 떨어지고, 오작동 사례도 잦다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경찰서 형사과 직원은 “CCTV는 명확한 관리 지침이 없고, 아무도 안 챙기는 게 맞다고 보면 된다”고 했고, 다른 경찰서 경무과 관계자는 “경무과는 CCTV가 설치된 각 과에서 고장 난 사실을 통보하면 업자를 통해 수리해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CCTV에 이상이 생기면 방치하는 사례가 흔하다. 한 경찰서 간부는 “꼭 가혹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머리 위에서 CCTV가 지켜보는 걸 좋아할 경찰이 있겠느냐”며 “CCTV가 고장나더라도 방치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CCTV 녹화물을 통해 경찰에 불리한 증거가 나온 적이 없다”며 “외부기관이나 상급기관에 관리를 맡기고, 의도적인 영상 삭제 시 처벌규정 등 명확한 관리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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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서 CCTV 한달치 녹화 안돼

ㆍ3월 강력팀 사무실 전체 고문기록 등 은폐 의혹
ㆍ세부규정 없어 인권 ‘구멍’

고문 수사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양천경찰서 강력팀의 사무실 내부 폐쇄회로(CC)TV 화면이 올 들어 한 달가량 녹화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각 경찰서에 설치된 CCTV의 경우 녹화·화면보관·점검 등의 관리 세부규정도 없는 것으로 밝혀져 수사 과정의 인권보호 대책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다.

18일 양천경찰서 등에 따르면 지난 3월9일부터 4월2일까지 강력팀 전체(1~5팀)와 일부 형사팀을 포함, 경찰서 내 16개 CCTV의 녹화기능이 작동되지 않았다. 녹화되지 않은 CCTV에는 “올해 3월28일 양천서 강력팀 사무실에서 고문당했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증언한 ㄱ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은 기간도 포함돼 있다. ㄱ씨는 뒤로 수갑을 채워 위로 꺾는 일명 ‘날개꺾기’ 등의 고문 정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다른 시기 고문 피해자들과 달리 입증할 녹화화면이 없는 상태다.

양천서는 검찰이 4월2일 유치장 특별점검을 나온 날에야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 양천서 담당자는 검찰 조사관이 “유치장 CCTV 녹화화면을 달라”고 요구하자 “주는 김에 우리도 녹화화면을 복사해놓겠다”며 녹화장치를 열었다가 작동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인권위가 진정을 접수하고 지난달 27일 양천서 상황실을 방문했을 때도 CCTV 화면 몇 대가 꺼져 있었다. 인권위 관계자가 “왜 안 나오느냐”고 묻자 근무자들은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현재 일부 가혹행위 피해자는 CCTV가 없는 곳으로 끌려가 고문당했다고 증언하고 있어 경찰이 고의적으로 녹화를 피해 가혹행위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일선 경찰서 폭력·강력팀 등의 조사 사무실에는 현재 피의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24시간 자동녹화가 되는 CCTV가 운용 중이다. 그러나 CCTV 화면 녹화나 보관을 의무화하거나 장비점검 등을 규정한 세부지침이 없어 경찰서별로 CCTV 관리가 제멋대로 이뤄지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현 CCTV의 자동녹화 방식은 저장용량이 다 차면 기존 영상 위로 덮어씌워져 녹화되는 방식”이라며 “녹화를 하고 이를 보관하는 것이 의무사항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남부지검은 이번 주말쯤 양천서의 해당 경찰관들을 독직폭행 혐의로 불러 조사할 예정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피의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경찰이 설치한 CCTV가 사실상 경찰에 유리한 증거로만 사용되고 있다”며 “CCTV를 관리하는 주체를 상부기관이나 외부기관으로 바꾸고, 위치를 변경하거나 의도적으로 영상을 삭제할 경우 처벌할 수 있는 정확한 지침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진식·류인하 기자 truejs@kyunghyang.com>


입력 : 2010-06-19 03:24:16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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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이적” 운떼고 우파 “행동” 맞장구
가스통·시너·오물까지…‘안보리 서한’ 십자포화
정부 힘 안통하는 시민단체 ‘붉은색 낙인’ 찍기
한겨레 황춘화 기자
» 참여연대가 천안함 침몰과 관련한 의문점들을 담은 서한을 유엔안보리 의장에게 보낸 것에 항의하는 납북자가족모임 회원들이 6월15일 오후 서울 종로 효자동 참여연대 건물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뉴스분석] 극단 치닫는 ‘참여연대 마녀사냥’

욕설과 폭행, 가스통과 시너…. 18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앞에서 벌어진 닷새째 집회에선 결국 오물까지 등장했다. 비정부기구(NGO)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천안함 사건의 철저한 조사와 평화적 해결’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 것에 대한 비판은 ‘이적행위·매국노’라는 감정적 비난으로 치닫고 있다. 집회를 주도하는 이들은 참전용사전우회, 고엽제전우회 등 극우 성향 단체들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참여연대에 대한 이런 ‘마녀사냥’은 안보 문제에 예민한 극우단체들의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불리한 정세를 돌파하려는 ‘희생양 삼기’를 넘어, 현 정부의 주류인 보수세력과 그동안 현 정부에서 소외돼 왔던 극우세력의 합작품이라고 지적한다.

안보문제를 지렛대 삼아 보수·우익단체들에 먼저 메시지를 던진 건 정부다. 이례적으로 외교통상부, 청와대, 총리실까지 나서 날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정운찬 국무총리의 발언은 총리가 지녀야 할 ‘품격’과는 한참 거리가 있을 정도로 감정적이었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정부가 특정 시민단체를 거론하며 이렇게 비난하는 것은 과거엔 없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하승창 ‘희망과 대안’ 상임위원은 “이번 서한 발송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이라며 “정국의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현 집권세력에게 참여연대는 쓰러뜨려야 할 ‘진보세력’의 상징 같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집회로 임기를 시작해 ‘대국민 사과문’까지 발표한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며 느끼는 심각한 위기의식이 특정 단체에 대한 십자포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참여연대일까.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참여연대가 지금껏 극단적인 주의·주장이 아닌 합리적인 활동으로 비교적 폭넓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신 교수는 “정부가 강제력을 통해 참여연대를 억압하기 힘들기 때문에, 끊임없이 낙인을 찍고 왜곡된 이미지를 생산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이런 의도를 현실화시키고 뒷받침하는 것이 보수언론·단체, 그리고 검찰·경찰 등 공권력이다. 보수 성향의 <조선일보>는 닷새 동안 참여연대의 서한과 관련해 22건의 비판기사를 쏟아냈다. <중앙일보>는 17건, <동아일보>는 12건이었다. 언론이 나서자 평소 우익단체와 거리를 둬왔던 보수단체들도 성명이나 세미나를 통해 ‘참여연대가 북한을 돕고, 정부 외교를 흠집내려 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경찰은 집회 저지에 소극적이고, 검찰은 ‘수사를 하겠다’며 분위기를 잡았다.


이런 결과로, 닷새 동안 참여연대 앞은 우익단체들의 과격 행동이 마음껏 표출되는 공간으로 변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극우단체들은 이명박 정부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 그를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신진욱 교수도 “보수층에서 극단적인 행동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이들은 자신들이 보수층을 대변해 행동하고 있다는 영웅주의적인 인식을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16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밝힌 경찰의 폭행·고문 행태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앞으로 검찰 수사로 사실 여부가 밝혀지겠지만 피의자 20여명이 인권위 발표를 뒷받침하는 진술을 했다는 점에서 경찰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는 지적이다. 경찰이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해 진정한 ‘국민의 경찰’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사대상 3명 중 2명꼴로 가혹행위 당해”=인권위는 지난해 8월부터 7개월간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조사받고 구치소로 넘겨진 피의자 32명을 조사한 결과 22명이 가혹행위를 당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몸 뒤로 수갑을 채운 채 두 팔을 위로 올리는 이른바 ‘날개꺾기’를 인권위는 고문행위로 판단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절도 혐의로 체포된 한 피의자는 “날개꺾기를 하다가 팔 관절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경찰이 잠시 살펴보더니 ‘부러지지 않았다’며 폭행을 계속했다”고 진술했다. 이 피의자는 구치소로 옮겨진 뒤 폭행으로 인한 통증을 호소하다 지난달 병원 치료를 받았다.

같은 달 절도 혐의로 체포된 피의자는 입에 솜이 물려지고 스카치테이프로 얼굴이 감긴 채 방석 위로 처박히는 고문을 당해 치아가 빠졌다.

2월 체포된 한 피의자는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자 몇분 후 양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고 가해자들이 모두 일어나 경례를 했다”면서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경찰관이 ‘별일 아니다’고 하자 ‘살살하라’고만 하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간부급의 묵인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진술이다.

◆감시 사각지대에서 고문=경찰이 뒤탈을 우려해 조사실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사각지대나 차 안에서 가혹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조사실에 설치된 CCTV의 경우 고정돼 있지만 카메라를 움직여 촬영 각도를 바꿀 수 있다. 특히 조사실에는 단 1대밖에 설치돼 있지 않아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지난 4월 피의자들이 검찰에 진정하자 자체조사에 나선 경찰은 5월 말 CCTV 각도를 다시 조정한 것으로 드러나 은폐·조작 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일부 사각지대가 있을 수 있지만 은폐될 만큼은 아니다”면서 “CCTV는 업체에서 관리하므로 그렇게 잡힌 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번 일로 문제가 돼서 조정했고 그것을 인권위가 은폐 증거로 지적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밖에도 지난해 9월 체포된 피의자는 경찰 차량 안에서 고문을 받으며 자백을 강요당했고, 지난 1월 체포된 피의자는 “허위자백 후 현장검증을 나갔는데 범행 장소를 정확히 말하지 못한 채 차량이 빙빙 돌자 경찰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라며 차 안에서 다시 고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강력 부인하는 경찰=경찰은 자체조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밝혔다. 양천서 관계자는 “일부 피의자가 마약에 취한 상태로 반항해 물리력을 행사하거나 수갑을 채울 때 팔이 약간 꺾일 수 있었겠지만, 그 외 조사 과정에서 물리력을 행사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인권위가 조사한 32명 중 일부만을 파악해 자체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를 통해 이번 일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국민의 경찰’로 거듭나겠다던 경찰의 다짐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경찰의 ‘인권 시계’가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일각에서는 실적을 우선시하는 경찰의 성과주의가 이런 일을 불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정부가 인권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지 않으면 실적을 내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경찰 등 수사기관은 고문이나 가혹행위의 유혹을 받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이귀전·이태영 기자
■경찰의 고문·폭행에 대한 인권위 조사결과
2010년 3월26∼31일 사무실과 자택에서 고문과 폭행
3월9일 사무실과 차량에서 고문
2월26일 사무실에서 고문
1월20일 차량에서 고문
1월18일 사무실과 차량에서 고문
2009년 12월17일 사무실에서 고문
11월4∼10일 사무실과 차량에서 고문
9월24일 차량에서 고문
9월1일 차량과 자택에서 고문
8월2일 사무실에서 고문
자료: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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